매일 새롭게 살 수 있는 마법 하나를 가지고 사는지도 모른다.
2시간 30분의 밤 비행, 비행기 창문에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표류하는 한 사내의 얼굴이 비치고 있다. 매니토바(Manitoba)주 위니펙(Winnipeg) 공항에 도착했다. 새벽 1시, 렌터카 회사는 문을 닫았고 호텔까지는 차량으로 20분 떨어진 거리다. 렌터카를 찾기 위해 아침에 다시 공항으로 와야 한다. 또 택시를 불러야 한다. 갑자기 호텔 체크인 시간이 궁금해졌다. 1시간의 딜레이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택시를 잡아타고 호텔로 가는 길에는 싸라기눈이 날리고 있다. 나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잘 오셨습니다. 늦게 도착하셨네요.”
할아버지 한 분이 환한 웃음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나에게 처녀지였던 위니펙에서 처음 말을 걸어준 노신사는 내가 타고 온 비행기가 연착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훤칠한 키에 느리고 낮은 목소리로 위니펙은 처음인지를 묻는다. 백인 할아버지의 안경 너머로 보이는 동양인 사내가 어쩌면 신기하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간단한 간식을 원한다면 식당에서 먹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했다. 이것이 시골 인심이라는 것일까, 단순히 밤 근무를 서고 있는 호텔 직원의 호의였을까. 예사롭지 않은 노인의 환대 때문에 위니펙의 첫날밤이 조금은 푸근해졌다.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나이 서른 하나, 아직은 이른 감이 있다. 암에 걸린 친구를 곁에 두고 아무렇지도 않게 웃음 지을 수 있을 만큼, 아직은 넉넉하지 못하다. 초등학교 선생님인 그 아이가 도리어 나를 보고 환하게 웃음 짓고 있었다. 사실은 몇 달 전에 알고 있었노라고, 이제야 수술 일정이 잡혔노라고, 환의(換衣)를 입은 자신의 모습에 놀라지 말라며 손을 잡는다. 많이 여위었지만 초췌하지는 않았다. 그때 의사들이 파업했다. 환자들은 수술을 받을 수 없었고, 수술을 받는다고 해도 후속 치료가 불가능했다. 친구의 수술은 자꾸만 미루어졌다. 환부에 주사를 놓고, 매스를 들어야 할 의사들이 파업하고, 환자들은 치졸하기 짝이 없는 싸움의 볼모가 되어 고통을 견뎌야 했다. 병자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는 드라마 허준의 대사가 지금도 생생하게 각인되어 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결국 온몸에 암세포가 퍼져 있어서 손도 대보지 못하고 수술 부위를 닫았다. 6개월 만에 친구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때 나는 두 아이의 아빠였고, 그 친구는 결혼 한지 갓 6개월이 지났다. 환자복을 입고 병원에서 누워있던 그 아이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생살을 찢는 아픔을 견디면서도 들꽃 한 송이에 깃들어 있는 거대한 숨결을 얘기하던 아이였다. 병원을 찾는 제자들의 고사리 같던 손을 붙잡고 그 아픔을 견뎠던 것 같다. 어찌해 볼 수 없는 아픔도, 남은 사람이 지고 가야 할 삶의 무게도 어쩌면 철부지 같은 우리의 몫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어머니에게는 철부지 아들이고, 아내에게는 철부지 남편이고, 아이들에게는 철부지 아빠일지도 모른다.
옷을 훌훌 벗어던졌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눈을 감았다. 갑자기 밤과 겨울과 여행이 고맙게 느껴졌다. 참 먼 여행이었다. 2시간 3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를 오래 걸려서 왔다. 여행은 많은 것들을 돌아보게 한다. 적당한 피곤과 낯선 곳에서의 밤이 만나면 가만히 들춰내고 싶은 기억들을 부르게 되는지도 모른다. 5월에 내리는 눈처럼 내 인생의 여정은 언제나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하루를 마칠 수 있었던 밤이 있었다는 것이다. 한 해를 점검하고 또 새로운 시작을 기대할 수 있었던 겨울이 있었다는 것은 철부지 같은 나에게 허락된 선물이었다. 밤이 온다는 말은 아침이 오고 있다는 말이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것처럼 우리는 매일 새롭게 살 수 있는 마법 하나를 가지고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에 나에게 잠을 주시지 않았다면, 생각의 폭주를 막을 수 없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