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외래 진료를 모시고 가야 해서 영어 공부하시는 곳에 미리 가서 파킹 후 엄마가 나오시길 기다리며 왠지 모를 설렘과 기쁨이 있었어요.
항상 엄마는 나의 보호자였고 학교에 가도 엄마는 언제나 어른이셨는데ᆢ 오늘은 내가 귀여운 아가를 기다리는 기분이 들었어요. 어리기만 한 딸은 50대 중년이 되었고 엄마는 어느새 팔순 소녀가 되신 듯합니다.
조용하지만 힘겨운 사춘기를 겪던 딸을 위해 한자 한자 밤새 꼭꼭 눌러써주신 편지 덕분에 바른 길을 가게 된 딸이기에 평생 감사할 뿐입니다. 살갑지 못한 딸 때문에 만나면 매번 서운한 말로 마무리하며 속상한 모녀지만요^^~
십 년 전 엄마가 암 선고를 받았던 날이 떠오르네요.
30년 이상 수영을 해오셨고 건강하기만 하던 엄마였기에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어요ᆢ어느 날 내가 퇴근 후 아빠가 할 말이 있다 하시는데 불안한 마음이 들던 순간ᆢ"내일 엄마 수술이다"라고 말씀하신 때, 나는 걱정보다 앞서 화가 난 것 같았어요. 바쁜 딸들 일하는데 방해될까 봐 두 분이 검사 후 결과 듣고 두려움 속에 수술 준비까지 ᆢ 그동안 딸들 몰래 조용히 해 온 것이었지요. 우리에게 방해될까 봐 준비하신 그 과정에 함께 하지 못해 죄스럽고 놀란 감정 ᆢ그리고 당장 내일부터 가득한 내 미팅 스케줄을 취소해야 하는 상황들이 한꺼번에 덮쳐왔던 듯합니다.
너무 놀라셨을텐데 ᆢ 공감과 위로의 말보다는 의료 기술이 좋아져 나을 거라는 설루션만 강한 척 되뇐 딸이었지요ᆢ
다행히 지금은 회복되셨지만 수술 직후에도 일하느라 바쁜 딸은 엄마의 힘겨운 치료와 회복의 과정에도 함께 하지 못했었죠. 몸도 마음도 얼마나 아프셨을까요ᆢ 도대체 일이 뭐라고 ᆢ나는 왜 그렇게 직장에만 충성하며 매달렸었는지ᆢ
회복의 과정 중 어느 날, 우울해 보이는 엄마를 위해 어머니학교 프로그램을 예약했어요. 바쁘지만 시간을 내어 주 1회 함께 참여하며 우린 회복의 시작점을 만들었던 것 같아요. 엄마이기 전에 같은 여자로서 함께 걸어가는 길에 느끼는 것이 많았답니다.
서점 세 곳을 운영하며 바삐 살아오신 엄마도, 그리고 나도 처음으로 함께 힐링을 하게 된 덕분일까요. 어느 날 엄마는 주일마다 예배를 참석하시다가 "크리스마스이브에 시간 되냐"라고 물으셨어요. 세례를 받는다고~ 웃으시던 얼굴이 떠오릅니다. 가족 모두가 꽃다발 들고 엄마의 "born again"을 진심으로 축하해 드렸죠.
코로나19 기간에 양쪽 무릎 수술을 받게 되셨을 때는 보호자가 함께 할 수 없어 병원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기만 했지요. 우리는 기도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다시 한번 깨닫으며 엄마의 존재가 감사함으로 진하게 다가왔답니다.
최근 들어 엄마는 더 이상 헤어 염색을 안 하게 되면서 우리 가족들은 엄마에게 "스타일리시만 유럽 할머니"같다고 말합니다. 뭔가 ᆢ오랜 세월 속에 자신을 너무 잘 알아 나만의 룩을 완성한 자연스러운 스타일링~
엄마는 잔소리쟁이라 만나면 피곤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풍파를 잘 이겨내신 모습에 엄마의 엄마인 나의 외할머니도 분명히 자랑스러워하실 거라고 얘기해드리고 싶어요.
내가 50대가 되니 엄마의 50대가 느껴집니다. 내가 결혼하고 아들을 낳으면서 50대의 엄마는 할머니가 되어버렸지요.
일하는 딸을 위해 손자를 돌보시며 할머니 소리를 듣게 한 것도 미안한데 엄마는 매일 우렁각시처럼 우리 집에 오셔서 청소까지 하시곤 했답니다. "내가 해도 되는데 왜 힘들게 했냐"라고 화내던 철없는 딸은 그때 그냥 고맙다고 할걸 ᆢ이라고 후회하는 나이가 되었네요. 사실 내가 고맙다고 표현하면 더 많은 일을 하게 되실까 봐 싫은 척 화를 낸 건데 ᆢ사실은 사랑하는 엄마가 고생하는 게 싫은 거였는데 ᆢ엄마는 일하는 내가 안쓰러워서 그랬을 거예요. 그렇게 엄마와 딸은 서로를 챙기느라 매번 부딪힙니다.
엄마는 먼저 걸어가시며 미래의 나를 보여주고 계시기에 마음이 짠하고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아직도 엄마가 걸어가신 길을 걷지 않은 딸은 엄마의 모든 것을 이해할 줄도, 얼마나 힘드셨는지도 모르지만ᆢ나를 낳아주고 길러주고 믿어주고 도와주고 누구보다도 안쓰러워해주셔서 마음 든든한 엄마의 큰딸은 지금도 조금씩 성장하고 성숙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