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일단 go! 못 먹어도 go!

by 민조이

시작은 전화 한 통이었다.


'S는 어떻게 지내고 있나?' 타 도시에 사는 친구 S의 안부를 물으려 평소처럼 메신저 앱을 열었다. 친구목록에서 그녀의 이름을 찾고 있는데 문득 S의 목소리를 들은 지가 꽤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스쳤다. 메신저 앱을 닫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

"오랜만이야!"

친구의 목소리가 밝았다. 짧은 인사 한 마디에도 그녀의 달뜬 얼굴이 그려졌다.

"요즘 좋은 일 있나 봐. 목소리가 잔뜩 신났네."

"내가 그랬어? 하하. 그게 말이지......."


우리가 마지막으로 연락했던 시점에 S는 출산과 육아로 일을 그만두었다가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재취업을 고민하고 있던 때였고, 나는 생각보다 길어지는 취업준비생 상태에 걱정과 초조함이 일상을 압도하던 시기였다. 서로 취업을 응원하던 중에 들은 그녀의 소식은 내게도 무척 반가웠다.

"며칠 전부터 재택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

재택 업무라니. 육아를 병행해야 하는 친구에게 딱 맞는 일이 아닌가. 곧바로 축하의 마음을 전했다. 끄트머리에 자그마한 부러움도 담아서.


"내가 일하고 싶은 만큼만 일 할 수 있어서 좋아. 출근 안 해도 되고, 일도 쉬워. 시급이 높지는 않은데 우리나라 최저시급보다는 더 받으니까."

"잠깐만. 우리나라 최저시급?"

"아, 외국 회사야, 내가 일하는 데가. 미국이었나?"


순간 머릿속에 경고등이 켜졌다. '일은 쉬운데 보수가 넉넉하다고? 왜 외국 회사가 한국에서 일할 사람을 구하지? 게다가 "미국이었나?"라니. 어떤 회사인지 제대로 알고는 있는 건가?' '유령회사', '피싱조직', '취업 사기' 같은 단어가 눈앞에서 빙빙 돌았다. 아무래도 미심쩍었다. 확인이 필요했다.

"그 회사 믿을만해? 혹시 네 개인정보만 빼먹고 잠적하는 거 아니야? 신분증이나 계좌번호 같은 걸 요구하진 않았지?"

S가 웃음을 빵 터뜨렸다.

"그런 거 아니야. 어떤 일인지 말하기가 조금 복잡해서 만나면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그냥 지금 말해야겠네."

그녀의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직무 내용은 꽤 흥미로웠다. 요약하자면 그녀의 업무는 웹사이트가 제공하는 정보를 분석하고 분류하는 것으로, 노트북과 인터넷만 있으면 집이든 카페든 도서관이든 어디에서나 할 수 있었다. 일하는 시간이 자유롭고 작업도 단순하고 쉬운 편인데, 우리나라 최저시급의 1.7배를 받는다니.

'얘는 이런 일자리를 대체 어디에서 찾은거야?'


"너도 여기서 일해볼래? 아르바이트로 일하긴 괜찮아."

"응? 내가?"


솔깃했다.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종류의 일이었지만 당시의 나는 찬밥과 더운밥, 비정규직과 정규직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말라가는 통장 잔액과 불안정한 신분에서 벗어나야 했다. 하루라도 빨리 일을 구해서 월급을, 단 몇 푼의 생활비라도 벌고 싶었다. 당장은 입사 지원할 곳도 없으니 일단 아르바이트라도 하면서 좋은 일자리를 기다려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다만 자신이 없었다. 대학 전공과는 완전히 다른 분야였고, 영어로 낯선 일을 해야 했고, 일하기에 앞서 역시 영어로 진행되는 테스트를 먼저 통과해야 했다. 무엇보다 '이번에도 불합격하는 거 아닐까'하는 불안감이 컸다. 그때는 불합격 통보의 쓴맛을 이미 여러 번 보았던 터라 취업 사이트에서 '입사 지원서 제출' 버튼을 누르는 것에도 진땀이 나던 시절이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속마음이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다.

"일단 해보는 거지. 관심있으면 도전해봐. 나도 했는데 뭐. 일은 쉬워."

"그럴까?"

"그래. 어떤 일인지 구경이라도 해봐 봐. 내가 입사 지원 사이트 링크를 메신저로 보내줄게."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담한, 나 대신 당장 이력서라도 내줄 것 같은 적극적인 S의 반응에 놀랍게도 힘이 났다. 불안을 이기는 방법은 어쩌면 불안한 마음을 모르는 척 지나치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그래. 까짓것 한 번 해보자. 안되면 말고. 20번 떨어지나 21번 떨어지나 그게 그거지. 막상 해보면 잘 할 수도 있잖아. 떨어진다고 해도 영어 공부한 셈 치면 되니까. 아니지, 아니야. 왜 미리부터 떨어질 걱정을 해. 어떻게 하면 붙을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지. 일단 해보자. 어쨌든 파이팅!'

나에게 말했다. 쪼그라든 자신감이 펴지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이날의 전화 한 통이 내 인생의 방향을 바꿀 줄은. S에게 두고두고 고마움을 느끼게 될 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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