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의 시간, 나머지를 위한 기록
땅콩집을 짓고 살자던 친구들이 하나둘 씩 배신(?)을 하고, 결혼을 했다.
어떤 녀석들은 배에 수박만한 걸 이고지고 다니며, 술을 멀리하기도 한다.
내 눈엔 여전히 철없고 투정 많던 10대, 혹은 엉뚱한 농담으로 밤을 새우던 대학생일 뿐인데.
그들이 누군가를 책임지고, 돌보고, 품어야 할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이 문득 신기하고 낯설기만 하다.
결혼을 하게 된 가장 결정적 이유는 뭐야? 연애만 해도 재밌게 살 수 있잖아.
그런 친구들에게 최근 내가 가장 많이 물어보는 질문이다. 그에 대한 친구들의 답은 동일했다.
'안정감'
아니다 싶으면 뒤로 빠꾸 할 수도 있고, 넘어져도 잡아줄 손이 있고, 하찮은 감정부터 실없는 농담까지도 온전히 받아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안정감.
단순히 도파민 가득한 행복이 아니라, 안정감으로부터 오는 행복을, 그들은 말했다.
안정감은 비단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삶의 거의 모든 선택의 밑바닥엔, 사실 ‘안정’이 깔려 있다.
한때 공무원이나 공기업을 선호했던 이유 역시, 정년까지 일할 수 있다는 고요한 보장 때문이었다.
“회사 때문에 죽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누구보다 건강검진에 진심인 우리의 모습도 그렇다.
결국 오래 살고 싶다는, 안정 속에서의 생존 본능이다. 자동차를 고를 때도, “하차감”이라는 우스갯소리 뒤에는 운전석에 앉았을 때 느껴지는 작은 안정이 있었다. 분노를 다스리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진정한 어른이라는 말 또한, 결국 ‘정서적 안정’에 도달하려는 여정 아닐까.
진짜 자유를 갈망하던 이들에게, 나는 한때 온전히 자유를 쥐여준 적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곧 하지 말아야 할 이유들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그들이 원했던 건 정말 ‘자유’였을까? 아니면 자유 속에서조차 길을 잃지 않게 해줄 안정된 틀이었을까?
음식점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자주 본다. 친구가 먹고 싶다며 데려간 이탈리안 레스토랑.
막상 메뉴판을 펼치면, “아무거나”를 외친다.
그 말 속에는 선택의 무게를 내려놓고 싶은, 결정의 불안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지 않을까.
결국 ‘아무거나’는 스스로를 편안하게 해주기 위한 선택지였던 건지도.
어찌보면 인간의 가장 보편적 욕구는 안정감 아닐까?
친구와 카페에서 각자 할일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대화다.
"날이 더워서그런지, 카페에서 에어컨을 너무 세게 튼거 같아. 적당히 좀 틀어주지"
"난 적당해서 괜찮았는데?"
적.당.히
내가 생각하는 세상에서 가장 주관적인 단어이자, 갈피를 전혀 알 수 없는 단어다.
살다 보면, 우린 참 자주 ‘적당히’라는 말 앞에서 엇갈린다. 그리고 그 ‘적당히’의 온도 차이로 수많은 오해가 생긴다.
싸울 때 가장 자주 튀어나오는 말, “적당히 좀 해!”
나에게는 분명 적당했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방에게는 적당하지 않은. 그래서 갈등이 생기는.
“다른 디자인과 적당하게 퀄리티를 맞춰주셔야죠.” 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보기엔 ‘적당’, 동료 A는 ‘조금 적당’, 클라이언트 B는 ‘전혀 적당하지 않음’.
이렇게 ‘적당함’은 사람에 따라 a, a-1, a-2, a-3처럼 끝없는 변수로 변주된다.
'적당함'의 기준이 가장 유사한 사람들이 만난다면, 그건 천생연분이겠다.
'권력자'라고 아버지를 저장해 놓은 걸 보면 주변인들은 엄청나게 웃으면서 이유를 묻곤 하는데, 아버지는 여러 가지 면에서 가장 파워를 가지고 계신 분이자 내게는 어려운 분이라 권력자라고 저장해 두었다. 나에게 소위 애정, 공부 모든 부분에서 '빡셈'을 안겨준 아버지를 닮았다는 소리가 그렇게도 달갑지 않았다. 그리도 부정했지만, 돌이켜보니 내 행동들에는 모두 아버지가 스며들어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나는 아버지를 많이 무서워했다. 아버지는 가정적이며 가족에게 헌신적인 분이셨지만, 자식에게는 지독할정도로 정말 엄하셨다. 무뚝뚝한 아버지는 나의 감정을 이해하고 어루만져 주기보다는 강하게 키우시고자 더욱 혼을 내시곤 했고, 본인이 살아온 방식을 (그리고 그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시기에) 내게 강요하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버지와의 충돌이 잦아졌다. 충돌 때마다 상처받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아버지가 접근하지 못할 단단한 벽돌을 쌓아 올렸다.
아버지는 나를 너무나도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크셨기에, 대학생때까지 통금시간이 있었다. 나를 과보호하는 아버지와 너무나도 자유분방한 나 사이에는 늘 갈등이 있었고, 때론 다쳐도 다쳤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자, 그 사람이 '힘들다'고 스쳐지나간 말에도 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 사람을 힘들게 하는 요소들을, 그 사람이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음에도 내가 그 사람의 모든 일을 해결해주고 싶어했다. 이런 부분들이 누구는 앞에서 말한 '안정감'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누군가는 나의 행동이 '적당함'을 넘어선 과함으로 다가올 때도 있다고도 말했다.
아버지는 때때로 불같이 화를 내셨다. 그 모습이 두려워서 나는 절대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이상하게도 나 역시 1년에 한두 번,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만큼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가 있다.
늘 평온하던 내가 갑작스레 달라지는 그 모습에 누군가는 놀라고, 엄마와 오빠는 말한다.
“그건 아빠랑 똑 닮았네.”
물론 아버지에게서 닮은 매우 좋은 면들도 많다. 해결점이 보이지 않는 문제에 맞닥뜨려야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무엇이든 중도 포기 없이 반드시 해내야지만이 직성이 풀리는 근성과 성취 지향적인 부분들.
닮아가고 싶은 부분만 적당히 닮았으면 좋았으련만.
닮고 싶지 않은 모습까지 닮아버린 나, 그래서 자식인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