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 또는 용서 또는 치유
어떤 죄수를 생각해 보자. 죄를 짓고 감옥에 수감된 그는 제대로 살아가기로 다짐했다. 출소 후 그는 다른 선량한 사람처럼 간단한 직업을 구해 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그리고 중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공부를 하며, 더 괜찮은 직업을 구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것으로 보상이 되겠는가? 크나큰 과오를 저질렀을 때, 그 이후로 단지 평범하게 살아간다고 해서 삶의 훼손이 복구될 수 있겠는가?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훼손된 삶을 회복할 수 없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 평범한 삶이 펼쳐지고 하나의 큰 오점이 있는 것이다. 백지 위에 찍힌 하나의 점처럼, 우리의 이목을 잡아끄는 것은 그 오점이다. 자의식의 상당 부분을 그 훼손된 시기가 지배하게 될지도 모른다.
자기가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 인식으로부터 오는 괴로움을 피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영원한 상처라고 부른다. (삶 자체가 영원한 상처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영원한 상처를 치유하는 길은 다만 다시 평범하고 선량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에 대해 저지른 과오 측면이 아니라, 자기가 자신에게 저지른 과오 측면에서 고찰할 때 분명해진다. 처벌을 받았으므로 사회에 남은 채무는 없다. 씻을 수 없는 죄는 없는 것이다. 다만, 그로 인해 훼손된 자신의 사회적 평판과 그로 인해 잃어버린 경제적, 시간적 기회비용이 있다. 결국 자신의 잘못으로 가장 크게 훼손된 것은 자기 자신인 것이다.
그렇다면 최우선적으로 보상해야 하는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 무엇이 보상일까? 그것은 인간적으로 과오를 덮고도 남을 만큼 더 훌륭해지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사회를 위한 것도 주변 사람들을 위한 것도 아니다.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서인 것이다. 그것이 과오를 저지른 사람의 숙명이다. 그것만이 그를 치유할 수 있고, 그것만이 그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충분한 보상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 놓이고, 그는 영영 불행할 것이다.
다시 출소자로 돌아가 보자. 그의 자기 인식에는 어딘가 비참한 구석이 있다. 그는 태생이 악한 사람도, 의도적으로 악행을 저질러 온 사람도 아니다. 크나큰 과오를 저질렀다는 자기 인식 속에서, 단지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은 그저 연명하는 것일 뿐이다.
실패에서 교훈을 얻듯, 과오에서도 교훈을 얻어야 한다. 교훈을 얻는다는 것은 실천한다는 것이다. 실천한다는 것은 변모한다는 것이다.
곱절의 노력과 곱절의 괴로움이 따른다고 하더라도, 변모하는 것을 인식하고 그것이 구원이라 여긴다면 이루어진다. 괴로움을 둘러싼 더 큰 환희가 이끌고 간다. 그런 경우에만 '사람은 변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제 시선을 돌려보자. 감옥에 가게 되는 잘못만 잘못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에게 그저 시간을 낭비한 것도 죄악의 무게를 가질 수 있다. 대학 시절을 술과 게임으로 보낸 사람,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준수한 업적을 바란 사람은, 대학을 졸업하며 마치 출소한 것처럼 자신을 바라볼 것이다. 그는 대학 시절을 나태하게 보냄으로써, 자신의 삶의 중요한 시기가 크게 훼손되었다고 느낀다. 이후에 아무리 평범한 삶을 산다고 해도, 실패했다는 생각과 회한이 그를 따라다닐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회한은 본인 스스로 자신을 배반했다는 인식에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
이제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불충분하다. 몇 가지 훌륭한 일을 함으로써만, 대학 시절의 나태함을 괴로움 없이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검은 점 뒤로 파란 점, 빨간 점들을 찍어가야지만 검은 점의 비중이 줄어든다. 여러 가지 죄악 가운데, '지금부터' 바뀌는 것은 '지금부터' 이루어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