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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먹고합시다 Aug 07. 2018

그 많던 차(茶)들은 어디 갔을까?

차문화는 고려시대에 들어서서 불교와 함께 정점에 달한다

차는 커피, 코코아와 더불어 비알콜성 기호음료 중 하나다. 하지만 커피나 코코아와는 다르게 특유의 은은한 향과 맛을 즐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테아닌이라는 성분에 의해 심신안정효과를 얻을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강력한 카페인을 모아 영국의 브렉퍼스트 티 처럼 각성용으로 쓰기도 한다. 


차는 커피와는 다르게 카페인이 체내 흡수되는 양이 적기 때문에 카페인의 부작용이 적은 편이다. 또한 차에서 가장 중요한 폴리페놀이라는 성분은 강력한 항산화 물질로 혈관과 피부의 노화를 방지해준다. 


차는 본래 차나무를 말한다. 소나무의 솔, 대나무의 대처럼 차도 원래 차나무라는 나무다. 그런데 차나무의 잎을 우려서 마시는 것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다 보니 무언가를 넣고 우린 물까지 그냥 차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차나무의 잎이 아니더라도 ‘차’라 부르기 시작했다. 차는 무언가를 우린 물 이라는 공식이 성립되지만 엄밀히 따지면 맞지 않는 말이다. (요즘 유행하는 루이보스차 또한 차나무의 종류가 아니라 남아프리카 원산지의 침엽수잎의 일종이다)


따라서 대추차, 인삼차, 생강차 등의 전통음료라 하더라도 사실상은 ‘탕(湯)’이라 불러야 함이 맞다. 대추탕, 인삼탕, 생강탕. 마찬가지로 커피, 마테차, 루이보스차도 차가 아니며 가장 원칙적으로는 엽차, 말차, 홍차 등만 차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런데 이런 언어적 현상은 현대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 부터 있어왔다. 조선시대 정약용이 쓴 <아언각비>를 보면 차와 탕을 구분하지 않고 쓰는 언어습관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원래는 차나무 잎을 우린 것을 차라고 불러야 마땅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탕이나 환, 고처럼 먹는 방법으로 착각하여 한 가지 재료를 우린 것을 모두 차라고 부르니 생강차, 귤피차니 하는 것이 나왔다.” 


커피가 조선에 처음 들어왔을 때, 왕실에서는 ‘가배’ 라고 불렀으나 민간에서는 ‘양탕국’ 이라 불렀으니 탕과 차의 의미가 어중간하게 혼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차의 원산지는 중국으로 알려져 있고, 그 유래는 신농씨가 물을 끓이다가 찾잎이 빠져 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차 문화가 확산된 것은 당나라 이후고 불교의 융성과 함께 스님들에 의해 민간에 까지 퍼지게 되었다. 결국 송나라 시기에 차는 담배나 소금처럼 국가의 전매품목에 들어갈 정도로 필수적인 음료였다. 


한국에서는 삼국시대 후반기에 마시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고 통일신라 당나라의 사신으로 다녀온 ‘대렴’ 이라는 사람에 의해 차나무 씨앗을 들여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찻잎은 지리산 자락의 하동에 심었다고 전해지는데 전남 보성이 녹차의 고장의 된 것 또한 환경적, 지리적 영향도 있었겠지만 지리산의 차 맥이 이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차문화는 고려시대에 들어서서 불교와 함께 정점에 달한다.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라는 말이 있듯이 당시 한반도의 백성들은 차를 밥처럼 매일매일 마셨다. 또한 고려후기 성리학이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조상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문화가 차츰 만들어져 갔다. 그리고 지금의 차례(茶禮) 형태가 점점 만들어져 갔는데, ’차례(茶禮)’ 라는 한자를 들여다 보면 원래는 술이 아니라 ‘차’를 올리는 형태였다. 



우리나라의 차문화를 정립했다고 알려진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초의선사’이다. 초의선사는 체계화 되지 않았던 한반도 땅의 다도 이론을 실제 생활화하면서 지금의 차문화를 정립해주었다. 차는 그릇, 물, 물의 온도, 마시는 방법, 음미법 등 그 과정과 절차가 상당히 복잡하다.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지금의 커피문화, 커피를 뽑는 법, 드립커피를 내리는 법 쯤의 그 복잡한 과정과 지식을 완성시킨 분이라 생각하면 된다. 


어쨌든 스님이었지만 이 분이 얼마나 차에 통달한 사람이었냐 하면, 차 하나로 정약용, 박제가 등 당대의 유명인사들과 깊은 교류를 맺을 정도였다. 그리고 추사 김정희와의 일화를 빼놓을 수가 없다. 추사가 제주도에 귀양을 갔을 때, 추사는 초의선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서신이 한자이었겠지만 그 뜻과 늬앙스를 충분히 헤아려 현대어로 다듬어 보자면)


“야이 차 덕후야. 내가 지금 제주도에 유배를 왔는데 어찌 면회 한번 오질 않니. 내 할 수만 있다면 스님의 차밭을 모조리 불태워 버리겠어.”


하지만 초의선사는 이 서신을 받고도 여전히 차 덕질에 빠져있었으니 김정희는 다시 한번 편지를 보낸다. 


“스님 얼굴은 보고 싶지도 않으니 ‘차’만 이라도 보내달라.”


그렇게 조선의 차문화를 정립한 그가 1866년에 사망한 뒤 그로부터 약 30여년 후 조선에서는 커피가 들어온다. 조선에 머물렀던 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벌 로월(Percivbal Lowell)이 쓴 그의 저서에 1884년 1월 “누대에 올라 조선의 최신 유행품이었던 커피를 마셨다.”는 기록을 남긴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10년 뒤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을 당시 러시아 공사관에서 커피를 처음 대접받았다고 전해진다. 


온 나라가 여전히 커피열풍이다. 치킨집만큼이나 많은 것이 카페다. 본인을 포함한 수많은 직장인들이 커피로 잠을 깨우고, 커피를 배우기 까지 한다. 


그 많던 ‘차(茶)’는 어디 갔을까?




글쓴이 : 김성현 (먹고합시다 필진 / 요리사 집안에서 혼자 글쓰는 변종)




취향대로 골라마시는 차와 커피, 먹고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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