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직장은 집 앞이었다. 격월마다 나오는 기독교 연령대별 잡지를 만드는 회사였다. 그곳은 유쾌한 사람들의 집합소였다. 우리는 함께 두 달마다 인생을 갱신해가듯 마감을 쳤다. 편집자 1인이 1권을 담당했고, 나는 청소년 잡지 편집자였다. 잡지를 혼자 기획하고, 준비하고, 진행하려면 두 달이라는 시간은 늘 부족했다. 우리는 인터뷰나 사진 촬영할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왔다. 어느 날은 잠깐 초등학생 인터뷰에 따라갔다가, 어느 날은 유아용 교구재 사진을 밤새 찍기도 하고, 갑자기 책에 실을 레시피를 위해 요리를 했다가, 여름이면 청소년 캠프에 가서 뛰어다녔다. 마감이라는 훈장 선생에게 혼쭐나는 기분으로 정신없게 일하다 보면 어느새 잡지가 나왔다. 동료들과 잡지 묶음을 등에 지고 창고로 나르던 순간이란, 정말 달지만 열받았다. "사무장님이 제 척추측만 책임져줄 거예요?" 물으면, "책 나르면 등 펴져"라는 농담이 날아왔다. 그게 좋다고, 왜 깔깔댔지.
지금 생각해도 코끝이 시큼한 우리의 결속력은 잡지의 폐간으로 끝났다. “성인용 잡지 빼고 모두 폐간을 결정합니다.” 샤부샤부를 앞에 두고 사장님이 말씀하실 때 눈물은 나는데,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이 책은 나와 함께 종료되는 게 나아, 다른 누군가와 끝나는 것보단. 그 누구에게도 주기 싫던 책이었다. 이렇게 난 무지와 방종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거다. 백조가 되고 보니 '기독교 잡지 3년' 경력은 다른 출판사에 내보일 만한 것이 못되었다. 동료들과 흥에 겨워 마감에 취하던 인생일 뿐.
그러다 있으나 마나 할 것 같은 이 경력을 정상참작해줄 만한 곳을 찾았다. 유아부터 청소년 대상으로 기독교 교재를 만드는 곳이었다. 물론 두 번째 회사도 나를 신입으로 쳤지만, 첫 직장에서 익힌 자잘한 기능들을 나름 잘 써먹었다. 기독교 잡지 한 권을 만드는 데 경험했던 다채로운 역할은 이후 어린이 교재 편집 '기능인'으로 사는 데 확실한 도움닫기였다.
기독교 어린이 교재는 다른 분야와는 좀 다르다. 어린이용 교재와 교사용 또는 부모, 목회자용 교재가 따로 나오며, 본문만큼 중요한 건 교구재다. 교구재 활용 영상과 사진, 만들기 방법 순서, 활동 삽화가 중요하다. 아무리 멋지게 그림을 그려 와도 만들기 구현이 불가능한 너비라면, 높이라면 소용없다. 편집자는 글자 보는 것만큼이나 이 모든 걸 통제하고 아울러야 한다.
첫 해 1년은 북한 어린이에게 보낼 교재 작업을 했다. 국제 NGO단체와의 협업이었고, 통일이 준비되는 과정에 아마도, 우선, NGO 단체들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준비하기 시작한 거다. 다양한 교구재는 만들 수 없었다. 환경적으로 풍족하지 않은 어느 곳에서도 활동할 수 있어야 했다. 단행본으로 찍힌 교재 안에서만 만들기가 가능해야 했다. 그때, "종이로 책 만들기" 버전이 세상에 이렇게나 많다는 걸 처음 알았다.
북한 프로젝트가 종료된 후엔 우리나라 어린이를 위한 교재에 투입되었다. 한국에선 교구재를 구현할 수 있다는 전제로 집필되었다. 활동을 가능한 한 줄이고, 축소하던 북한 교재와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모든 교구재가 입체 그 자체였다. 매일같이 소매 걷어 올리며 책상에 앉아, 숨이 꼴깍 멎을 듯이 크고 많은 입체 교구재를 '접고 오리고 접고 오리는' 행위를 반복했다. 영상 콘티를 만들다, '안 되겠다 네가 들어가라' 하면 어느새 영상 속에서 캐리 언니처럼 교구재 만들기를 하고 있었다. 새벽에 출근해 배경 천을 다리미질하며, 어린이 교구재 편집 기능인으로 쭉 살았다.
편집 기능인으로 산다는 건, 적어도 나에겐, 모든 작업의 순서와 사람과 방향을 파악하고, 비판하고, 대안을 찾아 결정하고, 투입되는 일이었다. 어린이 교재 분야가 갈 수 있는 방향은 무궁무진했다. 아이들이 늘 새롭게 자라듯이 교재도 늘 개발되어야 했다. 점점 어린이 교재 편집자의 삶은 내게 좀 무서워졌다. 몸과 마음에 퓨즈가 나가고 퇴사한 날, 다시는 어린이 교재는 편집하고 싶지 않다고 마음먹었다. 대신 글 쓰는 게 좋다고, 글 쓰면서 돈 벌고 싶다고 조용히 기도도 했다. 그래서 지금 내가 무얼 하냐고 묻는다면,
내 모든 기능을 소비했던 그 교재를 쓴다. 불태우자니 그 양이 너무 많아 집구석에 켜켜이 쌓은 교재들. 그 교재를 편집하진 않고, “쓴다.” 나는 온라인 교재 집필자가 되었다. 코로나로 교회마다 모일 수 없어 온라인 교재 제작 요청이 들어왔다고, 담당자는 열나게 일하던 내가 생각났다고 제의했다. 글 쓰면서 돈을 벌고 싶다던, 차마 남편에게도 말할 수 없던 바람이 떠올랐다.
편집과 집필 사이에는 어마무시한 차이가 있었다. 있는 내용에서 가지치기를 해가며 선택하는 일과 애초에 아무것도 없는 것에 내용을 담는 건 아주 다른 문제였다. 집필자를 쪼던 지난날들을 반성했다. 요즘은 육아 중인 부모에게 질문하고, 조카들을 온라인으로 불러 게임하며 집필 기능을 높이는 중이다. 연령 발달 단계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는, 과연 책대로 키우는 부모가 있을까, 질문한다.
내가 매일 고민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교사의 13인치 노트북과 어린이의 손바닥만 한 휴대폰 속에서 이들이 화목하게 놀 수 있는지다. 그리고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형식의 글을 쓴다. "여러분, 화면에 제일 아끼는 물건을 가져와 보여주세요." 이런 식이다. 온라인 회의 프로그램 안에는 다양한 장치가 있다. 다 같이 화면에 그림을 이어 그리거나 소그룹실에 입장해 팀별 회의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담당한 5-7세의 상황은 다르다. ‘글자를 모르고 양육자 도움 없이 어린이 혼자 한다’는 전제의 온라인 활동이 있기는 한 걸까. 회의감에 빠지다가 불현듯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다람쥐처럼 야금야금 모으며 '온라인 집필 기능인'의 삶을 사는 중이다.
독자 엽서를 받고, 종이책을 허리에 이고 나르던 때도 있었는데. 독자들과 모여 캠프도 하고, 인터뷰도 하고, 웬만해선 어떻게든 만날 자리를 주선하곤 했는데. 이제는 내 독자들이 화면 속에 있다. 각자 집에서, 작은 창 안에 앉아 게임하고, 박수 치고, 율동하며 소통한다. 모이기 싫어서가 아니라 모일 수가 없어서 화면 속에서라도 놀고자 하는 아이들이 내 독자다.
내 첫 잡지의 독자들은 지금 무얼 할까. 잡지를 만들던 때가 딱 10년 전이니, 그때의 독자들은 이제 사회인이겠다. 오늘 화면 속에서 자라나는 아이들과 함께할 내 노년은 어떨까. “얘들아, 지금 우리가 만날 순 없어도(앞으로도 어떠할지 모르겠는데 말이지), 세상은 결국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거야.” 이 말이 과연 오늘 내 독자들에게 통할까. 만날 수 없는 서로를 여전히 따뜻한 눈으로 보기 위해 글을 쓴다 생각하니, 내 밥벌이의 무게가 그리 가볍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