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영 Oct 07. 2022

초심은 그른 마음






얼마 전 15년 만에 소녀시대가 컴백했다. 하루 날을 잡아 소녀시대가 나오는 모든 예능을 찾아봤다. 보면서 나도 함께 울고 웃었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낸 동생들이 집에 놀러 온 기분이어서, 지지고 볶고 울고불고하던 시절 지나 이제는 숨소리만 들어도 안다는 그들 사이가 뭔지 알겠어서. 나는 오랜 친구들의 눈만 보면 그렁그렁 해지기에 소녀시대의 우정은 곧 내 얘기 같다.




예능 정주행을 하던 중 그들의 농담 같은 진담이 뇌리에 박혔다. “우리가 초심은 글렀다고 생각하거든.” ‘군무’의 상징인 소녀시대가 컴백을 앞두고 다시 춤 연습을 하며 느낀 소회였다(그래도 초심으로 돌아간 멤버도 있더라고 서로 이야기했다). 생각해 보면 나도 초심에 유난인 것 같다. 일에서 매너리즘을 지양하고(견딜 수 없는 수준), 관계에서 권태기 같은 건 생각도 않는다. 다른 이들은 어떨까. 초심을 잃으면 왠지 탓하지 않나. 그게 나건, 누구건.




어릴 적 다닌 교회에선 부교역자들이 2-3년이면 바뀌는 일이 다반사였다. 담당 교역자와 정을 나누기 시작하면 헤어져, 나중에는 얼굴 또는 이름 둘 중 하나만 기억나곤 했다. 눈물로 헤어지나 금세 리셋되는 관계. 나는 새로운 교역자에게 공동체를 다시 어필하며 결국 지나간 분들을 잘 잊었다. 내 제한적일 경험과는 이례적으로 지금 우리 부부는 부교역자로 7년 간 한 교회를 섬기고 있다. 나로서는 용케 장수 중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이 딱 두렵다. 나이가 찬 남편 때문인지 주변의 ‘올해가 마지막이려나’ 하는 순수한 눈치 때문인지. 실제로 ‘언제 나갈까. 나간다면 어떻게 나갈까. 좋게 나갈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나를 압도한다. 우리도 성도들도 서로에게 쏟는 애정이 언제까지 온전할 수 있을까. 이곳에서 언제까지 사고 없이 지낼 수 있을까. 좋고 좋고, 너무 좋았으니 이제 실망할 일만 남은 거 아닌가. 더 솔직히 말하면, 우리 부부가 이들과 헤어질 수 있을까. 잊힐 사랑을 주고받는 이 삶을 나라는 유약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나.

가만 보면 초심은 이미 글렀다. 습관처럼 최악을 상상하거나, 자꾸 끝을 상상하는 바람에.




초심은 대단히 그른 마음으로 부서 수련회를 갔다. 코로나 이후 첫 수련회였다. 시작부터 아이들이 고사리 손으로 짐을 나를 때, 상당히 이상하다 생각했다. 부서 학생들이 군대 제대한 것도 마음 한구석이 짠한데, 청년이 되어 마이크 잡고 이목을 집중시킬 때 소름이 돋았다. 게다가 너무 잘하니 마스크 속 내 광대는 승천했다. 마지막으로, 중 1부터 고 3까지 수련회 전참자 등장! 말수는 적지만! 항상 있는 그런 너! 너란 존재가 그냥 고마웠다. (아직 수련회 장소에는 가지도 않았다.)




와중에 내 뇌는 고장이 났는지 아득히 먼 예전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얘들아 쌤 좀 도와줘” 하고는 가만히 서서 짐을 풀고만 있었는데 갑자기 아이들이 하나둘 할 일을 찾아 나섰다. 준비해 간 데코 용품으로 수련회장을 꾸미고, 짐을 나르고, 예배 준비를 했다. 심지어 자신이 못하는 영역은 친구에게 부탁하고, 애를 쓰고, 잘한다고 서로에게 박수 치면서.




아이들은

연체동물처럼 바닥에 누운 서로를 멍하니 보다 웃고, 갑자기 떨어진 풍선 하나를 위로 던지며 놀다가, 굴러다니는 생수 뚜껑으로 알까기를 하고, 밥을 기다리며 ‘참참참’을 했다. 이어폰 나눠 끼고 노래를 듣다가 막내는 갑자기 혼자 춤을 추고 나머지는 박수를 치며 구경하면, 옆방 언니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같이 췄다. 이불 하나씩 품에 안고 마피아를 하다가, 종국엔 기도제목으로 ‘마피아’ 한번 해보고 싶다는 귀여운 꼬마도 나왔다. 조별로 모여 허심탄회 속 얘기를 꺼내는 시간엔 학생 하나가 작은 전등에 불을 켜고 다락방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련회 때문에 소개팅을 놓쳤다는 고민을 아는 형 고민이라고 퉁치며(실은 자기 고백이었음).




나는 분명 초심을 잃은 채 이곳에 왔는데 모든 게 처음처럼 느껴졌다. 아이들은 계속 자라고 있었고, 변하고 있었다. 코로나로 잃은 수련회를, 함께 모이는 이 시간을 아이들은 처음처럼 기다려왔다. 아이들은 특별한 것 안 해도 그저 함께할 때 행복해하는 존재였다. 덕분에 그날 그곳에서 우리는 어른, 아이, 너 , 나 할 것 없이 좋았다.




지금쯤 그래서 초심을 회복하겠다는 말을 할 법도 한데, 자신이 없다. 난 이미 지쳤고, 여기저기 아프고, 여력 없을 때가 많다. 아이들 말고도 챙겨야 할 가정사와 교회 일이 있다. 사모라고, 기독교인이라고 거리 두지 않을 절대 소중하고 오랜 친구, 친척 들이 있다. 하루살이 수준의 밥벌이라도 해야 할 업무가 근근이 있다. 오래 소원한 수업을 듣는 데 반장이 되는 바람에 챙겨야 할 식솔이 늘었다. 그래서 초심으로 돌아갈 순 없다. 적어도 우다다다 달려가던 초심은 지금 내게 위험하다.




대신 오늘 중심을 잡는다. 내가 꼭 해야만 하는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한다. 초심으로 불지폈던 지난 경험 덕에 쌓인 노하우를 녹여낸다. 낯익은 상황에서 지혜롭게 대처하고 덜 요동하기로 선택한다. 청년과 중년 사이에 낀 선생으로서 할 수 있는 만큼 한다. 해가 거듭해도 변하지 않는 부모와 자녀의 갈등 지점에서 마음으로, 기도로 아이들 편을 든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을 응원한다.




이렇게 초심 아닌 중심으로 지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울컥 초심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그럴 땐 워워, 지고지순한 마음이 지독하게 변하기 전에 마음을 붙잡는다. 그리고 또 기도한다. 초심 말고 중심 지키게 해달라고, 내가 앞설 때마다 하나님이 해달라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