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베이글 카페에 갔다. 앞서 대기가 길었지만 테이블 회전율이 빨랐다. 자리를 잡고 커피 한 잔을 들이켰다. 베이글 맛도 봤다. 목은 아메리카노 덕에 시원하고 입 안은 찰진 밀가루 맛에 기다린 보람을 느꼈다. 창으로 내리쬐는 가을 햇살과 늦은 오후의 그 시간이 어찌나 평온한지. 그래, 이게 바로 느긋한 유럽 감성이지.
천장이 영국 국기로 꾸며진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친구와 나는 “여기가 정녕 른든이 아니고 종로구냐!”며 유럽 앓이를 했다. 괜히 가을병, 유럽병이 돋아 엉덩이를 들썩이며 커피를 테이크 아웃 해 근처 궁에 갔다.
창덕궁에서 창경궁으로 넘어가는 뒷길은 뙤약볕 가운데 손차양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 나무와 나무 사이 폭이 좁아 그늘이 많고, 의자도 많아 앉아 쉬기에 딱 좋다. 지대가 높아 저 멀리 남산을 비롯한 명동, 익선동이 한눈에 보인다. 가만히 앉아 있노라면 유럽의 어느 공원 느낌이다.
유럽 감성은 대온실에서 배가 된다. 흰색 구조물과 유리로 건축된 대온실과 프랑스식 정원. 당시 수입해온 철제와 유리 들로, 프랑스 유학파 일본인이 지었다고 했다. 한국 최초의 양식 온실이자 일제 시대의 뼈아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한 곳.
대온실로 가는 길에는 볕에 찰랑이는 큰 연못이 있다. 바람에 나부끼는 버드나무 잎들이며, 연못에 얼굴 담근 하늘 구름이며, 점점 농익길 기다리는 초가을의 우거진 나무들이 우리 마음도 둥둥 띄웠다. 마치 아까 런던의 한 카페를 나와 근처 작은 공원에 와 있는 듯했다. 나는 잔뜩 유럽 기분에 취해 친구에게 물었다.
“혹시 지금 여기 런던 같아, 프랑스 같아? 유럽 어디랑 비슷해?”
친구가 잠시 멈칫하고 말했다.
“여기? 음, 그냥 한국 같아.”
덕분에 내 입은 삐죽 나왔다.
2019년 12월쯤 나는 친구와 파리 여행 티켓을 예매했다. 당시 예약한 숙소 앞은 자려고 눈을 감아도 보였다. 구글이 제공해주는 위성지도 덕분에 내가 갈 장소의 모든 입구와 주변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숙소에서 지하철역에 가려면 직진하다 좌회전하면 됐다.
짧은 여행을 계획했으므로 하루 한 끼 정도는 무조건 뤽상부르 공원이나 튈르리 공원에서 먹기로 했다. 오페라 하우스 근처의 스벅도 갈 예정이었다. 그곳은 천장이 아주 높고 모든 의자가 마치 궁전 같은 데 있을 법한 자태로 푹신하고 넉넉해 보였다. 크지 않은 파리 낭만주의 미술관에도 갈 생각이었다. 오랑주리의 모네 그림이나 루브르의 모나리자도 당연히 볼 것이지만, 나는 주류를 벗어난 듯한 장소가 주는 유니크함이랄까, 잔잔한 편안함이 좋기에.
포기한 것도 있다. 사진에 오리와 백조가 산책 중인 뱅센 숲도 가보고 싶었지만 너무 멀어 포기했다. 라파예트 백화점 화장실이라도 가보고 싶었지만 포기했다. 크리스마스 기간도 아니고 명품 구경은 취미에 없었다. 몽쉘미셀 성도 포기했다. 일정상 무리였기 때문에. 그리고 코로나로 포기했다. 여행 자체를.
위드 코로나로 바뀌며 가을맞이 해외여행 상품이 한창이다. 때마침 교회 한 청년은 무려 파리로 워킹 홀리데이를 갔다. 내가 알아놨던 숙소에 도착해 사진을 보내왔다(사진 받기도 전에 실은 내 마음은 먼저 도착했더랬다). 숙소 마당 빨래 건조대에 매달린 수건들이 나라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했다. 숙소 이모님과 빵집에 다녀왔다는 사진 속 에스프레소 잔에 쏙 들어가고 싶었다. 그 친구는 다행히 잘 정착해 도착하자마자 카페 일을 구했단다. 그리고 요즘 파리의 가을 하늘이 무척 예쁘다고 전했다.
최근 홍대를 거닐다 급하게 들어간 카페는 하필 ‘le pain de papa’라고, 프랑스 빵집이었다. 친구와 저녁 메뉴를 고르다가는 왠지 ‘키슈’가 당겨 어느 나라 음식인지 검색해보니, 프랑스 음식이었다. 식당 이름도 봉쥬르 테이블. 나의 몸과 마음은 전인적으로 유럽과 자석처럼 맞닿아 있었다.
지고지순한 유럽 앓이가 시작됐다. 유튜브에서 파리, 런던, 에든버러, 코츠월드 여행기를 검색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유럽에 사는 어느 인플루언서를 팔로하기 시작했다. 내년 봄, 가을엔 진짜 가볼 수 있지 않을까. 아니, 크리스마스에 갈까? 온갖 행선지와 때를 상상하며 실제로 좀 행복하다. 방구석 여행자의 전형적인 모습일까. 집 앞 공원 나무에 단풍이 채 들기도 전에 나는 유럽 앓이로 농익고 있다.
아아,
누가 내 마음을 수습해줄지 모르겠다. 목사 남편은 여행 좀 다녀오라고 한턱내는 말투로 흥을 돋우지만, 가는 발은 남편 발이 아닌 내 발이니 신중해야 한다. 남편이 개입되면 갑자기 여행이 곧 현실로 다가와 버린다. 교회에 살며 주일을 빠질 수 있을까(참고로 지난 파리 여행은 실은 4박 5일짜리였다). 실은 사역을 시작한 후 해외여행에 대한 자기 검열이 시작됐다. 여행이 덕이 되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놓이는 사모는 나 하나만이 아닐 거다.
어제는 가까운 일본에 단풍이나 보러 갈까 하며 잠깐 상상 속 행선지를 바꾸자 남편은 옆에서 한숨을 쉬었다. 방구석 여행자는 수시로 행선지를 바꿀 수 있는데 왜!
나는 이 가을 어디에 있나. 진짜 어디로 가고 싶나.
아아, 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