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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영 May 03. 2022

부목사에게 설교만큼 중한 것



남편은 오늘도 설교를 못 썼다며 한숨을 쉬었다. 남편이 설교를 급하게 쓰고 강단에 올라갈 때 불안한 건 남편만이 아니다. 나 또한 가슴이 뛴다. ‘미리미리 준비하고 쓰기 시작했어야지’ 할까 하다가, “왜 못 썼어?” 했더니 남편은 오늘 할 일이 많았다고 했다. ‘나도 할 일 많아. 재택근무하며 집안일하는 것도 얼마나 힘든데. 그래도 기한은 지켜.’라고 말할 뻔하다, “오늘 할 일이 뭐였는데?” 물었다.




“본당에 걸 현수막 작업을 두 개 해야 했어. 그리고 선교 헌금 작정표를 만들어야 했고, 예배 때 할 찬양 리스트를 정해서 사람들에게 보냈어. 교회 의자 구매한 거 세금 계산서를 떼야 했고. 아, 소라 집사님 집에 있는 운동기구를 미숙 권사님 댁에 옮겨 드렸어.” 나는 마지막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닭 한 마리 칼국수를 먹으며 남편에게 닭다리를 양보했다.  




남편의 하루는 새벽 4시 반에 시작된다. 새벽기도에 가야 하니까. 가끔 그보다 이르게 깨어 시계를 잘못 보고, “늦었어!” 하며 소란을 피울 땐 새벽에 겨우 잠든 잠이 달아나 억울하다가도 남편이 안쓰럽다. 심장이 약해 언제고 쓰러져도 고개가 끄덕여질 상황인데 늘 잠이 모자라니 걱정이다. 게다가 남편이 가끔 교회 본당 천장에 매달려 전등을 갈 때가 있는데, 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있는 아슬아슬한 자태를 보며 난 생각한다. “저러다 떨어지면 다치겠지. 피가 나겠지. 남편은 고지혈증 약을 먹으니 지혈이 되지 않아 죽을 수도 있겠지.”




성도님들이 계절이 바뀌며 옷이나 가구, 책 등을 교회에 가져가라고 남편을 부를 때면 과연 남편이 이삿짐센터에 다니는구나 싶다. 게다가 버린 가구와 50리터 비닐에 가득 찬 옷가지가 우리 집 거실에 놓이면 이내 헛웃음이 난다. 남편이 교회 배수관이나 터진 수도관을 고쳤다며 사진을 보여주면, ‘어디까지 할 수 있나 보자’ 싶고, “지금 목사님 혼자 본당 화분을 옮기느라 고생하고 있어요.” 누가 전하면 이제는 그냥 이게 네 일이지 싶다.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까진 가정마다 심방을 다니며 담임 목사님은 설교를, 남편은 먹기를 담당했다. 일단 다 받아먹기로는 1등. 어느 해는 딸기밭을 다녀왔다고 해서 ‘응?’ 했더니, 아침 심방에도 딸기를 주셨고, 점심에도 딸기를 주셨고, 오후에도 딸기를 주셨다고 했다. 가끔 사모들도 함께 가는데, 무려 싱싱한 회만으로 배가 터질 수 있겠단 느낌을 받은 날, 그날따라 자리 배치, 속도 조절에 실패한 나는 일주일을 앓았다. 가장 귀한 것을 내어놓으신 마음을 생각하면 몹시 감사하면서도 실제로 위장이 쓰라린 상황을 교역자들이라면 다 알 거다.




대중교통 타는 게 불편하신 어르신들을 댁에 모셔다 드리는 것도 남편의 일이다. 어르신들은 교회도 끝났으니 ‘오늘은 추어탕, 다음에는 갈비탕 먹자’며 쏘실 때가 있단다. 그러나 실은 주일 오후, 남편은 교회로 돌아가 일과를 정리해야 하니 제안을 거절할 때도 있는데 그럴 때면 그렇게 서운해하신다고 전한다. 실로 남편은 이렇게 ‘손주’ 사역을 담당한다. 이것이 사역에서 가장 중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우리 교회에선 나이가 60이면 애기, 70이면 청춘, 80이면 언니, 오빠시다. 연령층이 높은 편인데, 마침 내 몸은 어르신들의 쑤시는 몸을 백 번 이해한다. 몸이 안 좋아지고 낮에 산책하면서부터는 어르신들을 자주 만난다. 골목 어귀에 앉아 계신 어르신, 이웃 야채 가게에 앉아 파를 함께 다듬는 어르신, 공원 산책에 나온 어르신들까지. 그리고 그분들은 꼭 내게 묻는다. 사모님 어디 가냐고. 인사치레라 생각하고 몇 번은 대충 대답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질문이 진심이라는 걸 눈치채고 구체적으로 답한다. 가방을 활짝 열어 “딸기가 세일이에요.” 하거나, 방금 다녀온 서점이 왜 좋은지 설명하기도 한다.




어르신들의 관심에는 쉽게 거부할 수 없는 마력 같은 게 있다. 모든 게 진심인 점. 그걸 알아서 가볍게 넘길 수가 없다. 그들도 내 말을 한 번도 허투루 듣지 않는다. 허리가 아프다는 어르신께 걷기를 추천했는데 그날 이후 나만 보면 공원을 몇 바퀴씩 돌았는지 일러주신다. 이렇게 매사에 진심이시니. 오늘, 남편이 성도님 댁을 오가며 넋두리를 듣느라 설교 쓸 여력이 없던 하루가 중하다 생각된다.




임종을 앞둔 성도님이 마지막으로 은행에   몸이 불편한 자녀 대신 남편과 동행해야 했을  울컥했다. 나와 함께 본당 의자를 열심히 닦던 어르신을    결국 장례식에서 사진으로 뵈었을 때는 울었다. 어르신들이 서로 부의금을 주네 마네 농담하실 때는 웃음이 나면서도 코끝이 찡하다. 여태 천국엔 올챙이 모양으로 가는  알았다며 소녀처럼 웃으실  나도 천국이 불현듯 가깝게 느껴지고 궁금해진다. 언제고 다가올 어르신들과이별을 꽁꽁 숨기고 싶다.




물론 때로 교회가 도시 한복판에 있고, 내 또래 청년과 청장년이 많은 교회라면 어떨까 상상해본다. 그러면 생계와 자기 계발에 적극적인 성도들 보며 자극받고, 나 또한 세련되고 내실 있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또래에 비해 너무 뒤처진 일상을 살고 있지 않나 답답하기도 하다. 그러다 곧 그 기분을 접는다. 그리고 한 발 한 발 꾹 눌러가며 오래된 동네 한 바퀴를 돌며 마음을 굳힌다. 닦이지 않은 길 중간에 오롯이 서서 그 길을 마저 갈지, 누가 봐도 말끔한 샛길로 합류할지 묻는다면 당연 전자를 선택할 테니까. 나도 살살 어르신들도 살살 걷는 이 길이 귀하게 느껴지니까.  




나나 남편이 어르신들과 진심이 통하는 사이인 것이 무슨 상을 받은 것처럼 뿌듯하다. ‘어여삐 함께 살며 천국을 꿈꾸는 상’이라든지, ‘오래되고 느린 곳에 깊게 뿌리 박힌 상’이라든지. 남편이 설교를 다 썼는지 모르겠다. 오늘 써놔야 할 텐데. 내일 볕이 좋다면, 분명 어르신들이 교회에 오실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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