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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영 Jun 14. 2022

장전할 필요 없어




지척에 사는 우리 어머님은 갑자기 잘 오신다. 오늘도 갑자기 오셨지만 굳이 이 더운 날씨에, 이모님 댁에 가시는 길에, 내게 호박죽을 주셨으니 감사할 수밖에. 나도 시원한 수박과 전병, 떡, 상추를 바리바리 싸서 어머님 가방에 넣었다. 우리는 서로 살림에 대한 신의를 확인한 후 잠시 식탁에 앉았다.   



어머님은 휴대폰이 이상하다고 했다. 카메라를 찍으려는데 자꾸 본인 얼굴이 나온다는 거다. 어머님이 이렇게 물어 오실 때 나의 효도는 빛을 발한다. 아들은 엄마의 생활 속 불편을 좀처럼 개선해주지 않지만 며느리는 즉시 한다. 며느리는 평소 살갑게 연락하지 않는 본인의 성정을 알기에, 시어머님의 구체적인 요청이 어떤 날은 반갑다.   



어머님은 본인이 찍은 제주도 풍경 사진을 몇 장 보여주시다가 “내가 보여주려던 건 이게 아니야, 보여주려던 건 이게 아니고.” 연거푸 이게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대체 또 뭘 보여주시려고! 어머님은 영상 하나를 재생하셨다. 영상 안에는 언뜻 봐도 우량아인 아기가 꼬물꼬물 거리고 있었다. 손주 조카다. 근데 어머님은 왜… 이걸 보여주시지? 나는 왜… 이걸 봐야 하지? ‘왜왜왜’ 병이 도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몸이 달아오르는 기운에 벌떡 일어나 컵을 가지러 싱크대에 갔다. 그리고 정수기 앞에 가고, 정수기에서 냉수를 받아 다시 어머님 앞에 앉았는데, 그때까지도 영상은 끝나지 않았다. 어머님은 조카가 아기를 낳고 너무 힘들어 “엄마! 얘 데려가요!” 했다고 전했다. 나는 냉수를 내려놓고 다시 냉장고 앞으로 목적 없이 가며 말했다. “낳을 수 있는 게 감사한 건데 그러셨네요.”  


 

이거로 됐다. 충분했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똑바로 했다. 어머님이 내 말 뜻을 알아들었건 말건, 나는 말했고, 그 이후 상황은 잘 기억나질 않는다. 영상에 연이어 어머님의 다채로운 이야길 들었던 것 같다. 다행히 어머님은 본인이 하고픈 말이 있으실 때 주변의 분위기나 뉘앙스에 개의치 않으신 쿨한 분이셨고, 내가 살짝 마음 상한 지점을 눈치 채지 못하셨다. 다만 나는 시원한 물을 마시는데 내내 갈증이 났다.



위드 코로나 후 교회가 모든 사역을 시작하며 덕분에 방 두 개를 주일에 개방했다. 나는 교회에 방을 개방하는 거나 무엇을 하는 것에는 염려가 없다. 되려 성도들이 들르는 방에 과자를 잔뜩 사놓고 싶고, 포스트잇에 하트를 크게 그려 맥심 상자에 붙이고 싶고, 책장을 서점 신간 코너처럼 꾸며 놓고 싶다. 단, 발생할 나도 모를 변수가 두려웠다. 사람을 만나는 일.



어머님표 영상 덕분에 한 가지 또렷해진 거다. 늘 대비해야 할 것은 성도들과의 교제. 수많은 어르신들이 지나가다 던지는 애정과 관심. 그리고 그에 정직하고 가뿐하게 반응하여 삶의 괴리를 만들지 않는 것. 내가 그동안 줄곧 실패한 부분. 게다가 교회에 부임한 지 7년, 결혼한 지 8년인데 아직 임신을 하지 못했으니 어르신 성도들의 아쉬움과 안타까움은 가히 벅차다. "사모님, 내가 사모님네 태몽을 꿨어." 하신 분들이 두세 분 정도였으니까.  



코로나 전에는 오후 예배 때마다 앞자리에 앉는 장로님은 늘 사탕을 주셨다. 내가 자리에 앉으면 팔을 쭉 뻗어 주먹에 쥐고 있던 사탕을 ‘오다 주웠다’ 느낌으로 주시는 거다. 그리고 내게 물으셨다. 저 앞에 기타 치고 있는 목사는 아직도 애가 없느냐고(여기서 저 목사는 내 남편이다). 어느 날, 본인이 재직했던 병원 사이트, 산부인과 카데고리를 보여주셨다.  의사 고르는 법을 요목조목 일러주시며.



연세가 있으셔서 그런지 요즘은 장로님이 오전 예배만 드리고 가신다. 도통 마주치기가 어려운 중에 어느날 화장실 앞에서 우린 재회했다. 반갑게 인사해 주시면서 내 등을 토닥여주신 한마디. "아이고, 우리 사모님이 많이 약해져서..." 그렇게 짱짱하기로 제일가던 장로님이 건넨 힘빠진 한마디였다. 당장이라도 다시 병원을 일러주고, 의사를 소개해주실 줄 알았는데. 코로나라는 3년이란 세월에 장로님도 나도 왠지 힘이 쭉 빠져버린 그날의 재회를 잊을 수 없다.



어떤 권사님은 내가 선물 드렸던 노트를 여전히 앞에 두고(드린 지 5년은 족히 된 듯), 내게 귀엣말을 하셨다. "내가 매일 기도할게요. 부러 애 안 갖는 줄 알았어. 사모님 힘든지 몰랐어."



가슴에 장난감 크기 대포 하나 세우고,

'어르신들 누구든 또 임신 얘기 꺼내보세요. 저 이번에는 진짜 발사합니다.'

하고 있었는데, 어르신들 안쓰런 표정과 위로 한마디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 내가 이래서 우리 어르신들을 좋아하지. 집에 돌아와 찌그러진 마음에 풍선 불 듯 ‘후’ 하고 숨을 넣어본다.



*그리고 솔직히, 가장 지척의 어르신, 그 누구보다

양가 부모님께는 왠지 죄송한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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