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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영 Sep 10. 2021

초록이 안녕

나에게는 어려웠던 임신


결혼한 지 6년 만에 아이가 생겼다. 태명은 '초록이'였다.

왕왕 침잠하길 좋아하는 내 배 속에서 자랄 테지만, 아이만은 싱그럽고 초록초록하길 원했다. 배란기 테스트기와 종류별로 구매한 스무여 개의 얼리 임테기 덕분에 임신 사실을 4주쯤부터 알았다. 아기집이 생기기도 전에 병원에 갔고, 그다음주에 아기집을 확인하고, 그다음주에 아기 심장 소리를 듣고, 약간의 피고임을 확인했다. 자꾸 속을 게워내어 과일 말고는 먹을 수 있는 게 없었다. 냉면 한 번 시원하게 들이켠 게 초록이가 완식한 음식 전부다.

 

8주 차 초록이 심장 소리를 쩌렁쩌렁했고, 심장 박수도 정상, 팔다리가 볼록한 젤리곰이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신기한지 왜 이토록 좋은 걸 이제야 알았을까 싶었다. 배 속에 생명이 심기고 그것이 생을 누리고자 '파닥파닥 한다'는 사실을 주변 임산부, 엄마들로부터 들어본 적이 없다. 이 귀한 것은 다들 각자 간직했었구나. 그래서 둘째, 셋째를 낳는구나. 임신한 후, 내가 바라본 세상은 논리적일 수 없으며 신비 그 자체였다. 처음 느껴보는 행복이었다.


피고임 크기는 줄지 않아 조심해야 했다. 먹고, 화장실 가고, 씻는 시간 외에는 누워서 상태를 지켜봐야 했다. 질정제 처방과 함께 '눕눕' 시간에 돌입했다. 그 기간 세상에서 제일 다정하셨던 외할아버지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동생이 장례식 안내 화면을 사진 찍고 '증손' 자리에 '초로기'라고 적어줬다. 나는 장례에 참여하진 못했지만 침대에 누워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슬픔을 꾸욱 눌러가며, 마음만은 가족들과 함께 그 시간을 보냈다. 장례식에 참여한 친척들과 부모님 지인들은 나의 임신 사실을 모두 알게 되었다. 초록이는 꽤 이른 시기에 주변에 알려졌고, 그만큼 충분한 관심과 기대를 받으며 내 배 속을 유영했다.


그리고 다시 병원에 찾아간 9주 차. 남편은 항상 진료실엔 나만 들여보냈고, 본인은 소파에 앉아 책을 읽었다. 나는 좁은 진료실 안에 다리를 쩍벌한 채로 누운 산모 곁에 남편들은 어디쯤 서야 하는지 가늠이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남편들이 같이 들어가는 경우가 꽤 많지 않은가! 의사에게 물었다.

"오늘은 남편도 같이 봐도 되나요?"

"물론이죠.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남편에게 녹화된 영상 말고 실제로 지금 초록이의 심장 소리를 들려주긴 처음이었다. 진료실에 함께 들어가 초음파를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젤리곰 초록이는 망망대해에 둥둥 떠 있는 수초처럼 그저 가만히 있었다. 파르르 떨리던 심장이 그날따라 잠잠했다. 의사는 고개를 갸웃하며 초음파를 다시 확인하고, 또다시 확인했다.

"심장이 뛰질 않네요."




나는 유산도 열심히 했다.

인위적으로 자궁수축을 유도하는 약을 처방받았고, 다음날 소파 시술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궁수축을 위한 약은 소화제였다. 소화가 안 되는 나에게 안성맞춤일 약이 초록이를 빼내기 위한 약이라니. 시술 날짜를 잡고, 약을 타고, 주차장에 가서 차에 앉을 때까지 내가 무슨 생각을 했었지.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혼자였다. 소파 끝에 매달려 울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마저도 윗집이나 아랫집에 사는 아이들에게 울음소리가 끔찍하게 들릴까 봐 목소리를 낮춰 울었던 것 같다. 한 번쯤은 큰 소리로 속 시원하게 울었으면 좋았을걸. 다음날, 시술대에 누웠을 때에도 왜 그렇게 침착했는지 모르겠다. 순서에 열 맞춰, 줄 맞춰 걷듯 나는 유산도 열심히, 정성스럽게 했다.


기억나지 않는 일이지만, 시술 후 마취가 채 풀리기도 전에, 나는 이 소식을 전해야 할 친구들이 있으니 남편에게 사진을 찍어달라 했다고 한다. 심지어 '브이'를 하고 찍었더라. '나는 유산했지만 괜찮아' 이 메시지를 주고 싶었던 걸까. 정신 차리고 남편 휴대폰 속 사진을 보고, 남편을 나무랐다. 내가 취한 자세에, 내가 요구한 사진이면서. "이걸 찍어달란다고 진짜 이렇게 찍냐!"며 버럭 했다.


나의 경우는, 유산을 하니 입덧이 깨끗이 끝났다. 먹고 싶지만 못 먹던 음식들이 잘도 생각이 났다. 특히 팥빵이 먹고 싶었는데, 바로 먹으면 왠지 초록이에게 미안해서 먹지 못했다. 의사는 피검사 결과, 유산 이유가 엽산 대사 문제라고 했다. 고용량 엽산을 섭취했어야 한다고 했다. 나중에 난임병원에서는 이마저도 이유가 아니라고 했지만, 어쨌든. '유산의 위험을 미리 알 수는 없었던 걸까? 난임병원에서부터 임신 준비를 했어야 했나? 임신 전 부지런히 검사를 받았어야 했는데!' 초록이는 게으른 엄마를 만나는 바람에 세상에 나올 기회를 얻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초록이에게 담백하고 슴슴한 친정엄마 밥상 한번 먹이지도 못했고, 나 또한 개운하게 푹 잔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에게 임신은 체리 한 알로 한 끼를 때우고, 얼굴에선 진물이 나며, 하루 종일 누워 지내고, 새벽 3-4시나 되어야 겨우 잠이 드는 고된 일상이었다. 자연임신을 하고, 남들처럼 집 앞 병원 다니며, 먹고 싶은 걸 남편이 사오는, 그런 임신은 없었다.


소파 시술 후 한동안은 드레싱 때문에 계속 병원에 가야 했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임산부, 아기들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더라. 그러고 보니 내가 다닌 병원은, 첫째를 품에 낀 산모들이 둘째를 낳으러 오는 병원 같았다. 토덧 기간도 아닌데 얼굴로 달아 올라오는 후끈한 기운이 지금도 생각난다. 슬픔, 억울함, 속상함, 화남이 뒤섞였을 내 얼굴이 반쯤은 마스크로 가려져 다행이었다. SNS를 도배하는 도치맘, 도치파덜 게시물을 당분간 보지 않기로 했다.




심장 측정기가 '삐' 소리를 내며 한 줄만 남기듯, 내 일상은 멈췄다.

나란 존재가 있기는 한데, 무엇을 위해 무엇 때문에 숨을 쉬는지 모르겠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중 <열두 개의 달 시화집> 중에 12월 '편편이 흩날리는 저 눈송이처럼'이라는 책을 골라 들었는데, 여덟 명의 자녀를 둔 '칼 라르손' 화가의 그림이 가득한 책이었다. 골라도 가족 그림이 가득한 책을 골라서는, 책 곳곳에 나온 사랑스런 그의 자녀들을 훔쳐보며 눈물을 훔쳤다. 그중에서 제일 가슴에 와닿은 그림은 아이들이 놀다 저녁을 먹으러 들어간 것인지, 눈이 너무 쌓여 밖에서 놀 수 없던 날인지, 눈만 소복이 쌓인 그림이었다. 초록이가 예정대로 태어난다면 2021년 2월생이었을 텐데. 눈 덮인 집 마당에 초록이가 잠시 왔다 간 것 같은 이 그림을 계속 봤다. 초록이는 있다 없어졌고, 대신 무력감이 눈덩이만큼 쌓였다.


 

<열두 개의 달 시화집_12월_편편이 흩날리는 저 눈송이처럼>, 윤동주 외 17인 지음, 칼 라르손 그림, 저녁달고양이




남편이 목사다.

내 기질은 거의 모든 상황에서 100퍼센트 불안하지만, 내가 믿는 하나님은 100퍼센트 그 이상 완벽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신의 영역인 생명이 사라졌다. 그동안 내가 믿어온 신념, 생명의 고귀함, 가족의 질병과 그것을 참고 견딘 모든 시간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특별히 질병은 내가 그동안 시험 쳐온 영역 중에서도 가장 자신 있는 영역이었는데, 또 여기서 문제가 생기다니! 이번에는 난이도가 최상인지라 문제부터 읽어내려갈 수 없었다. ‘하나님이 역시 나에게 좋은 것을 줄리가 없지. 나는 늘 그러하듯 또 실패하지.’ 최선이 아닌 차선의 인생을 살고, 영원히 부족할 거라 믿는 게 차라리 편할 것 같았다. 당시 나에게 누군가 '불행이 곧 신의 축복'이라고 가르치려 할 때 난 속으로 조소를 했다. '이별했다고 이별책을 가져오시네. 지금은 차라리 요리책이 낫겠어.' 신을 믿기에, 이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누군가는 유산 후 몇 개월 만에 다시 임신하기도 한다. 또 누군가는 '그때는 슬퍼서 눈물이 났지. 하지만 다 잊혀'라고 말하기도 한다. 위로하고 싶은 사람은 '아프겠다' 하고, 조언하고 싶은 사람은 '잊힌다'고 한다. 유산 후 1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아프다. 다낭성 증후군에, 피부염, 만성 요통과 경추통, 근육통, 불면증, 우울감에 시달린다. 마음을 돌볼 겨를 없이 몸이 아파지고, 매일 몸을 살피느라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지도 몰랐다. 가장 늦게 알아차린 것이 우울증과 불면증이었으니까.


어느 때보다 진실하게 나를 마주하려 한다. 직장을 그만두고 임신이 또 다른 하나의 목표가 되어 달려온 나, 유산 후 주변의 시선과 판단에 몸서리치면서도 맞장구치기를 선택했던 나, 큰 돌덩이가 가슴에 콱 박혀 소리 내 울지도 못하면서 '나아지고 있어'라고 말하는 나. 몸 여기저기서 보내는 민감한 신호에 일일이 답할 힘이 없는 나. 나는 지금 괜찮은가? 학창 시절처럼 의젓하게 넘어가려다 자꾸 걸려 넘어지는 기분이다.




살고자 글을 쓴다.

앞으로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냥 오늘 하루 잘 살고자 읽고, 보고, 듣고 글을 쓴다. 그러다 보면 잘 살고 있겠지. 누군가 호젓하게 손 흔드는 세상에 답할 기력이 없다면, 그렇게 섬에 갇혀 있는 것 같다면 나와 같이 글을 써보자고 권하고 싶다. 아직 그 끝은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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