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코는초등학생 사장님!>, 코사카 키타로 감독, 2018
유쾌한 마음을 품고 싶은데 왕왕 실패한다.
교회 예배를 마치고 출산일이 가까운 만삭인 산모 얼굴을 보고 헤어지려는데, 임신한 다른 산모도 함께 있었다. 둘은 교회 어르신이 주신 아기 옷을 고르고 헤어지자 했다. 그들은 교회에 남고, 나는 혼자 집으로 들어오는데 - 교회 마당 위 집이 있기 때문에 그 길이 무지 짧았음에도, 그들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인 것과 무관하게 - 쓸쓸했다.
왜 내 배는 볼록하지 않지. 왜 나는 끝까지 초록이를 품지 못했지. 지금 내가 이래서, 이런 나라서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오늘 김장을 한다는 엄마가 떠올라 전화를 걸었다. 김장은 잘했는지, 아픈 덴 없는지 전화한 척하면서 엄마 목소릴 들으니 좀 안정이 되었다. 소파에 가만히 앉아 내가 느낀 이 감정이 무엇으로부터 기인하고, 그래서 지금 기분이 어떤지 생각하고, 기록해보았다. 느낀 감정은 일단,
수치감 / 초라함 / 불쌍함 / 불행함 /
민망함 / 거절감 / 우울감 같은 것
보기만 해도 안쓰러운 단어들이지만 종종 우리 상태를 한데 묶는 단어들이다. 생긴 건 저래도 역할은 제대로 하고 있는 셈. 그런데 오늘 일만 봐도 저 단어들은 언제나 타인으로부터 기인한다기보다 나 스스로 만들고, 찾는 단어이기도 하다. 어두운 감정이란 이렇게 쉬이 올라온다.
나의 특이점은 좋을 때도 인스타를 열지만, 울적할 때도 인스타를 연다는 점이다. 감성적인 인스타와 감정적인 내가 만나 심적 콜라보를 이룬달까. 오늘은 꼭 뭘 남기고 싶은데 뭐라고 쓸까 하다가, '불쌍하다'라는 단어 외에 내 상태를 포장할 기운도 여유도 없어서 귀여운 사진과 이야기를 담고 무심히 한 줄 덧댔다.
'집에 들어오는데 내가 불쌍하게 느껴져서 왕 고구마와 두유, 귤을 주문했다'라고.
이렇게 인스타에 싸지르고(일종의 배설) 이불킥이 두려워, 댓글 3개 달리는 사이 얼른 덧댄 한 줄을 지웠다(그 부분을 지워도 맥락에 문제는 없었다. 인스타에 이토록 정성인 내가 웃기다).
오늘은 사실 지원했던 동화 공모전에서 족족 떨어진 날이었다.
그래서 집에 들어와 '웃코는 초등학생 사장님!'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봤다. 맑게 웃고 싶었는데 마냥 웃을 이야기는 아니었다. 더 이상 낳을 글도, 낳을 아이도 없는 내가 혹 재미와 유쾌를 놓친 걸까 싶어 틀었는데, 더 울어도 좋을 내용이라니!
웃코가 부모를 잃고, 조부모님이 하는 여관 사장님이 되는 이야기다. 그곳에 있던 각종 귀신들과 학교 친구들, 손님들과 버무려지다 또다시 이별을 앞둔 웃코 이야기는 '유쾌'보다는 '슬픔' 쪽에 가까웠다. 어른인 나도 작가가 심은 메타포에 가슴이 턱턱 막히는데, 아이들이 이 만화를 이해할 수 있을까 싶었다. 남편에게 물었다.
"이걸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다고? 때가 되고, 본인 눈에만 보이는 귀신 친구들이 사라지는걸?"
"이해하지. 친구들하고 헤어지는 건데."
"그럼 사고 트라우마 때문에 갑자기 숨이 차는 건?"
"기침하고 숨차는 건 아이들도 가끔 그래."
'남편 말이 맞다' 싶다가, 일본만의 촘촘한 서정을 절레절레하는 남편이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을까 싶기도 하다.
어쨌든, 우리 부부는 우울할 때마다 웃코 자세를 따라 하기로 했다.
포인트는, '에에에?' 하며 앞뒤로 엇갈리는 팔의 위치와 모양이다. 우리는 화면을 멈추고 웃코 자세를 따라 하며 오랜만에 웃었다.
자꾸 가라앉는 마음을 위로위로 끌어올리려면 '기록'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고, 지척에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고, '읽고, 듣고, 보는 것들'이 주는 환기,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아직은 걸핏하면 생각나는 초록이를 잊으려는 게 부자연스러운 것 같지만 이렇게 웃코 자세도 따라 하며 다른 이의 슬프고 재미난 이야기속에서 방향을 잡아가야지. 가야 할, 좋을 방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