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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영 Sep 12. 2021

잠깐 엄마여서, "엄마 미안해"

마이 네임 이즈 탑불효


유산한 주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외할아버지는 엄마에겐 세상에서 제일 다정했던, 아빠에겐 당신을 '착하다' 해줬던, 동생에겐 인생의 팔 할이었던 분이다. 눈이 펑펑 오는 날 당신의 목도리로 내 몸을 칭칭 감아주었던 할아버지가 하늘나라로 가셨다. 할아버지의 온화한 성품은 식구들이 평소 자주 모이고, 서로 힘이 되는 원동력이었다. 할아버지가 요양병원에 계신 이후로는 언제 돌아가실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 속에서도, 그날이 되면 온 가족이 하나 되고 서로를 위로할 것 같았다.


그런데 정작 나는 초록이를 지켜야 했다. 그때 잠시 엄마였으니까. 침대에 누워 가족들이 보내주는 사진과 메시지를 보며 큼큼한 목 끝의 기운을 애써 넘겼다. 나 대신 남편을 보냈다가 남편이 병원을 잘못 찾아가는 웃픈 에피소드도 있고. 가끔 "그때 유산한 줄도 모르고 누워 장례를 보냈네! 이럴 줄 알았으면 장례식에 갈걸" 하며, 듣는 사람 동공이 흔들릴 농담을 혼잣말로 하곤 한다.




나는 자식을 잃고, 어미 앞에 선 '탑 오브 불효'를 찍은 자식이었다.

소파 시술하고 병원을 나서는데 차가운 복도에 친정 엄마가 있었다. 집에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엄마는 굳이 친정에서 먼 병원까지 찾아왔다. 자식이 아프면 배로 쓰라린 게 어미일 텐데, 아픈 것만큼 불효도 없는데. 내가 얼마나 불효녀냐면 당시에 엄마의 표정이 기억나질 않는다. 내 정신이 없었으니까. 대신 대화만 기억한다.


나는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말 대신

"왜 병원까지 왔어. 집에서 기다리라니까~"

센 척했고, 엄마는

"히히, 네가 너무 안 오더라고."

귀엽게 말했다.


우리 모녀로 말할 것 같으면 평소 서로의 손을 따뜻하게 잡거나(추울 땐 잡음), '사랑한다' 하며 포옹하는 사이는 아니다. 그렇지만 달라도 너무 달라서 친해진 단짝 같은 사이랄까(내 입으로 이렇게 말하니 버릇이 좀 없어 뵘). 임신했을 땐 곧 죽을 듯이 힘들어도 친정에 가질 않았고, 혼자 집에서 견뎌보았다. 엄마가 나이 50이 되고 뇌경색으로 쓰러지기 바로 전 해, 나는 결핵이었다. 밥상을 차려 드려도 모자랄 21살에 나는, 매일 출퇴근하는 엄마에게 밥상을 얻어먹으며 병의 흔적을 지워갔다. 나는 9개월 후 완치 판정을 받았고 그 즉시 엄마는 뇌경색과 경미한 출혈로 응급실에 갔다. 응급실 좁은 커튼 속에서 엄마가 모든 걸 토해내고 어지러워하던 때가 잊히질 않는다. 이후 엄마는 6개월 간 재활 치료를 받아 마비되었던 운동 신경은 되찾았고 아직 반쪽 감각은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 몸의 절반은 뜨거운 온도나 상처를 알아채지 못한다. 당시 이모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언니가 아파서 속상해. 우리 언니 너무 고생했어."


그 말투가 잊히지 않는다. 내가 엄마 동생이어도 그랬을 터. 이모가 너무 이해되고, 나는 엄마에게 평생 빚진 마음이다. 그래서 나는 임신했다고 엄마 집에 가면 안 될 것 같았다. 입덧 때문에 밥 차려줘도 양껏 먹지도 못할 테니 주는 엄마 마음 아쉽고, 나는 미안할 거다. 그럼 엄마도 미안할 거고, 나도 더 미안할 거고. 안 봐도 뻔한 그림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때로 다시 돌아가면 무조건 친정행을 택할 것 같지만.




엄마는 아빠도 잃고 손주도 잃은 그 해를 어떻게 기억할까.

기억할 새 없이 바쁜 게 답일까. 엄마는 나뿐 아니라 엄마의 엄마, 혼자되신 외할머니를 챙기기에 애쓴다. 그리고 요즘 외할머니 때문에 속상한 얘기를 많이 하는 편이다.  


"네 할머니가 하루에도 몇 번씩 자꾸 쌀을 씻어."

 

엄마 옆태 내서타일!


외할머니는 얼마 전 경도인지장애 진단을 받으셨다. 자꾸 건넌방 단발머리 소녀들을 위한 밥상을 준비하시기에 다시 한번 검사를 하셨으나, 경도인지장애가 맞단다. 치매와 경도인지장애 사이인가. 아마 할머니는 어느 하루는 치매 단계에, 어느 하루는 경도인지장애 그즈음에 계신가 보다.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면 이해할 만한 나이 89살 어르신의 넋두리 내지는 섬망 증세 앞에서 엄마도 무너질 때가 있다. 어느 날엔 엄마가 토라진 말투로 말했다.


"오천 원짜리 감 두 봉지를 사 갔더니 돈을 헤프게 쓴대. 왜 그런 식으로 말할까? 다시는 안 사갈 거야!"


내가 대답할 새 없이 엄마는 속사포로 말하곤 한다.  문득 내가 무언가를 사 가면 "돈 쓰지 마" 하시는 할머니가 생각났다. 할머니에겐 나나 엄마나 다른 가족들에 비해 넉넉하지 않은 편이니 돈을 쓰지 말라는 거겠지. 딸의 안녕을 바라는 엄마 마음과 엄마의 안녕을 돕고 싶은 딸의 마음은 늘 충돌한다. 그리고 엄마의 기준에 부족한 딸의 안녕은, 정확히 말해 '가난'은 잔소리와 핀잔으로 끝을 맺는가 보다.




할머니를 향한 원망과 걱정이 버무려진 엄마를 보며, 엄마가 할머니 되었을 때를 상상한다.

'작고 등이 굽을 엄마를 나는 더욱 안아주고 사랑해야지' 하고 생각하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이 대화를 하는 모든 순간, 엄마는 우리 집에 와서 나 대신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접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체력적으로 정서적으로 도움을 받을수록 딱 그만큼 초라한 나를 마주한다. 엄마에게 용돈 한번 많이 드리지 못하며, 손주 재롱을 두세 번 선물해도 모자를 35살에 유산하고, 엄마한테 밥 달라고 하는 나를. 이미 무릎에 물이 차고 손목에 파스를 붙이는 친정 엄마에게 빌붙어야 하루하루 연명하는 나는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 텐가!


시어머님은 어느 날에 종잣돈 쥐어주시며 "네가 아프니 네 엄마가 고생이지" 하셨다. 도우미 이모님이라도 부르라며 주신 돈인데, 괜히 얼굴이 벌개졌다. 나의 아픔이 곧 엄마의 아픔이자 시어머님 입장에선 남편의 고생일 테니까. 돈 주시는 사연을 듣자니 빨리 나아지지 않는 내 몸이 되게 초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것은 빨리 떨쳐내야 할 '기분 나쁜 척하는 기분'이니까 뒤로 하고, 통장에 돈을 이체했다(돈이 싫지는 않은 기분).




몸뿐 아니라 마음도 가난한 지점이 있다.

엄마가 외할머니에게 ‘감 두 봉지’ 때문에 혼난 지점에서 내 자리를 본다. 앞으로도 친정을 도울 형편이 아닌, 신발 놓는 자리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평상 위가 내 자리다. 쉬기 편하고 시원한 그런 자리지만 딱딱한 바닥에 오래 머무를 수 없는 평상. 누군가 바리바리 먹을 것을 싸와 앉아 먹곤 하지만 딱 그 자리 외엔 제공할 것이 1도 없는. 엄한 불똥이 남편에게로 튀기도 하는데, 가끔 남편이 목사가 아니었음 한다. 왠지 합법적으로(?) 떳떳하게 돈을 많이 벌고 싶다고 말해도 되고, 그렇게 살고 싶다. '돈'만 생각하고 '돈'을 추구하며 '돈' 앞에서 뭐든 하면 '돈'은 어떻게든 모이지 않을까. 재정이라도 충분하면, 잉태하지 못한 불효를 대신할 수 있진 않으려나.


분명 아닐 걸 알면서도 오늘 하루는 왠지 엄마에게 너무 미안하다. 당분간 엄마가 못 되어서 미안하고, 가난해서 미안한 내 이름은 탑불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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