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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영 Sep 13. 2021

체리맛 사랑

정신 차릴 새 없이 빵 굽기


교회에 태몽을 꾸신 분이 두 분 계셨다.

'교회'와 '태몽'이 함께 놓일 수 있는 단어인가 싶지만 어쨌든. 한 권사님 주장에 따르면 우리집 계단 위로 과일 바구니가 가득했으니 분명 이것은 태몽이라고 하셨다. 다른 한 권사님은 뼈 곰탕을 주시며 교회 본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꽃, 과일 바구니가 가득했다고 이것 또한 태몽이라고 하셨다. 반짝이는 눈을 하고서 그 얘길 하시는 두 분께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잠시 망설여졌다. '제 태몽을 꾸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도 어색하고, '교인이 태몽을 믿어도 될까요?'는 사이가 어긋나는 듯했다. 최대한 내 동공을 꽉 붙잡고 "와아, 그렇군요"까지 했다.


비슷한 시기에 임신을 했던 다른 사모님들과 모임 자리에선 "그래서 그 태몽은 누구의 것일까" 몇 분 고민했고, 성도들의 교역자를 향한 사랑이 깊고 그윽하다는 것에 동의했다. 그리고 성도들의 관심과 사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우리집 계단 꽃바구니'(아래는 우계꽃이라 하겠다) 태몽을 꾸신 권사님은 매일 일터를 오가는 길에 손수 만든 반찬들과 과일을 넣어주셨다. 물 한 입에 뱃멀미를 하던 나는 그 권사님이 주시는 과일로 하루하루를 연명했더랬다.




하루는 우계꽃 권사님이 체리를 주셨다.

입덧 기간 친정에 가질 않았던 나는 신혼 초 구천 원어치 체리를 사준 아빠가 생각났다. 신혼집은 친정집 지척이었지만 아빠는 딱 한 번 집에 왔다. 체리도 친정집과 신혼집 중간 사이에서 받았다. 딸네 딱 한 번 오는 무뚝뚝한 아버지지만 그때의 체리 검은 한 봉지는 마음 한편을 뜨겁게 했다. 이후 내 최애 과일은 체리가 1등이다. 비싼 과일이라 1년에 한두 번 정해놓고 먹곤 하는데, 세상에, 초록이 덕분에 호강한다 생각했다. '나 혼자 다 먹어야지' 생각하며 그날 하루는 체리맛 사랑으로 버텼다.


매주 교회에 예배가 있는 수요일, 금요일이면 '탕탕탕'. 권사님들은 신기할 정도로 주중 이틀씩 우리집 철문을 두드리셨다. 병원에선 누워 있으라고 했지만 때론 현기증을 참아내며 나가 반찬을 받아 냉장고에 넣었다. 받다 받다 몸 둘 바를 모르겠던 나는 감사한 마음 보답하고자 비스듬히 앉아 수를 놓아 권사님께 자수 가방을 선물했다. 지금 다시 보니 '감사'를  '땡큐' 또는 영문으로 했으면 좀 더 있어 보였을 텐데. 그땐 눕눕 시절이라 한시가 급했으니까.


우계꽃 권사님께 드린 자수 가방



내 유산 소식을 듣고 우계꽃 권사님은 너무 미안해하셨다.

혹여 당신 때문에 부담을 느낀 건 아닌지 걱정하신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되는 게, 난 권사님의 체리로 버텼으니까. 지금도 눈물이 맺힐 정도로 감사하니까. 나와 유일하게 초록이를 먹인 분이니까. 게다가 유산 후엔 또 다른 분들의 공급이 끊이질 않았다. 마치 '우계꽃 권사 수고했어. 이제는 우리가 담당할게' 하시는 것처럼. 매주 군고구마를 구워주신 분도 계셨는데 너무 맛이 좋아서 어디서 사신 고구마인지 여쭤볼 정도였다. 그러다 고비(?)가 좀 왔다. 한 권사님이 냉장과 냉동을 가득 채울 각종 고기와 생선, 연어회 그리고 곁들여 먹을 야채와 식후 과자와 음료 등을 넣어주셨다. 에페타이저부터 본식, 디저트까지 챙겨 주신 셈. 하필 이날 영수증이 함께 딸려와 손이 덜덜덜 떨리는 금액을 확인했다. 문제는 이것이 꽤 조리를 해야 하는 음식들이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미 '눕눕'을 하다 유산을 한 나는, 위장 장애로 고생 중이라 먹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대부분 아랫집이나 남편에게 주었는데 입에 대 보지도 못한 연어회가 지금도 아른거린다. 그날 저녁, 남편은 내 앞에서 연어회 먹방 영상을 찍었다. 두툼한 연어 한 점을 고추냉이 살짝 푼 간장에 찍어 한 입에 넣고는 '부드러워 미쳐' 하더라.


교회에 살면 임신하면 임신했다고 유산하면 유산했다고 이렇게 갖은 모양으로 챙겨주신다. 솔직하게 말하면, 채워주시려는 어른들의 사랑에 일일이 보답할 힘이 없던 그때는 문 두드리는 소리에 숨가쁘긴 했다. '음식을 지금 조리할 수 없는데 무슨 수로 먹지?' 생각도 자주 했다. 그때의 나는 냉장고 앞에 서서 그 음식들을 넣기도 힘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팔다리에 힘이 좀 붙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는 사람의 마음이 보인다. 또렷하게. 당신들 몸 가누기 힘들어 지팡이를 짚고 걷는 어른들이시다. 불면증에 밤새 잠을 못 자면서 반찬을 해다 출근길에 들르시는 분들이다. 반찬을 직접 할 힘도, 재정적, 시간적 여력도 없는 분들이 자신의 것을 쪼개 주신 음식들. 그렇다면 여기서 잠깐. 우리가 돈은 없고, 뭐로 보답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릇도 돌려 드릴 겸 뭐를 하긴 해야겠는데 뭐가 좋을지...




남도 좋고 나도 좋은 건강빵을 굽기 시작했다. 정신 차릴 새도 없이.

베이스는 통밀과 쌀가루로 하고, 단호박, 바나나, 견과류, 밤을 번갈아 섞어 가며 만들었다. 비건 빵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우유보다는 두유가 소화가 잘 될 것 같아 두유를 넣었고. 집에 있던 두유는 거의 모두 빵에 들어갔던 것 같다. 버터 대신 포도씨유를 넣었다. 처음에는 이모랑 친정엄마가 참고한다는 유튜버 '호주 가이버 아저씨'의 쉬운 레시피를 따라 하다가, 나중엔 카페 주인들 유튜브를 참고했다.





망하는 날이 3번이면 그중에 하루는 성공했다.

성공하는 날만 성도님 댁에 찾아갔다. 어느 날은 되고, 어느 날은 안 되는 서비스를 시작한 것이다. 연어회 권사님은 남편에게 당장 전화를 걸어 "목사님, 빵에서 깊은 맛이 나"라고 칭찬하셨다고 했다. 그 말만 믿고 계속 만들어 이웃에게 나눴는데, 나중에 솔직한 평이 왔다. 어느 가정의 자녀가 알려줬는데, 다 같이 모여 빵을 한 입 먹고, 건강빵이란 걸 확인하고 당황했다고. 이 얘길 듣고 나중에 그 집엔 초코칩을 넣어 가져 갔다. 


어느 집은 저녁 8시쯤, 문 앞에서 만나 전해드리려는데 이미 권사님은 잠드신 상태였다. 맞다. 어르신들은 초저녁에 잠들어 새벽 2시에 깨서, 4시에 교회에 오시니까. 권사님 자녀분이 우리 부부를 잡고 집 현관까지 들어가셨다. 집 안에 들어와 앉으라는 걸 "집사님, 저희 지금 거의 잠옷이에요."라고 말씀드리니, 떡 한 접시를 담아 주셨다.





그릇 돌려 드리러 간 밤에, 새로운 그릇에 떡을 받아왔다.  

퍼받은 사랑 '돌려주려' 온 내 마음이 살짝 들킨 느낌이었다. 누군가 사랑을 주면 잘 받으면 되는데. 한사코 그 사랑을 '돌려주는' 마음이 나에게 있진 않았을까. 보답은 꼭 해야 하는 걸까. 어른들의 사랑이 보답을 원하는 사랑이었나. 나는 받는 게 아직도 힘들구나. 내 자아를 몇 조각으로 나눈다면, 그중에 하나는 '착한 사람'이고 싶은 마음과 '아니 죠아 사람 죠아’ 하는 자아가 있는 것 같다. 이 경계에서 전자를 선택하면 티가 날 것이다. 성도님들은 내 나이의 두 배도 넘는 세월을 살아오신 분들이니까. 후자를 선택하는 마음은 상대에게도 온전히 전해지겠지.


성도들의 체리맛 사랑을 떠올리며,

정신 못 차리게 빵을 구우며,

초록이 잃은 슬픔을 이겨냈다.


(이때만 해도, 나는 살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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