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이걸> , 1991
어린이를 위한 책을 쓰고,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나니 매일 챙겨 보던 '나의 중드(중국 드라마)'를 못 보겠더라. 중드의 법칙은, 눈에 띄지 않던 평범한 여주가 잘생쁨 남주를 짝사랑하고, 남주가 여주에게 관심을 보이려 할 때쯤, 둘 사이에 지구 열 바퀴를 돌아도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커다란 오해가 생기므로, 그것을 풀어나가는 이야기다. 완벽한 순정만화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지금 쓰면서도 남주가 “워, 시환니” 하는 게 생각이 나 흐뭇한데, 이렇게 중드만 보고 있다가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질문은커녕, 연애문답서만 만들 수 있을 것 같더라. 물론 이것도 좋은 생각이긴 하지만! 선택과 집중을 잘하고 싶으니까. 중드는 잠시 접어둔다. 그리고 무엇을 볼까, 하다가(읽지는 않고) 영화 <마이걸>을 보았다.
뭔가 치명적이고 압도적인(뭔지 모르겠음, 걷기만 해도 귀여움) 베이다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세상.
베이다 아빠는 장의사다. 덕분에(?) 베이다 곁엔 죽음이 가까이 있다. 집에서 아빠가 시체를 염하고 장사하는 모습을 매일 보기 때문이다. 심지어 영화 시작에 베이다는 친구들 앞에서 시체가 있을지도 모를 관을 활짝 여는 장면이 나온다(시체는 없었지만). 장꾸력이 상당한 베이다에게 중요한 두 사람이 있다. 토마스라는 아주 순한 남자사람친구는, 베이다 말이라면 지붕 위에서 하늘의 별을 따 볼 시늉까지는 할 애다. 금방 포기하겠지만. 다른 한 사람은 빅슬러 선생님. 베이다가 훗날 결혼하고 싶은 '남자'다. 그래서 베이다는 방학인데도 빅슬러 선생님의 시 창작 수업에 참여한다(아빠 여자친구 쉘리에게서 훔친 돈으로 등록함). 첫 수업 시간에 베이다가 시를 읊자 빅슬러 선생님이 말한다. 이 영화가 내게 던지는 첫 번째 묵직한 울림이었다.
"네가 세상을 보는 방식, 두려움 내지는 욕망, 비밀을 보여줘."
이 말을 듣고 베이다는 속으로 가장 두려운 비밀을 말한다. 자신이 엄마를 죽였다고.
*자막 단어 선택은 너무 직접적인 거 같아
갑자기 딕테이션을 시도했다.
그래서 틀렸을 수도...
베이다 엄마는 출산하고 이틀 만에 죽었다.
그래서일까. 베이다 아빠는 자기만의 비밀을 꽁꽁 간직한 채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냥 그렇게 시체를 염하며, 이 하루가 어쩔 수 없는 것처럼, 그것 외에 할 게 없는 것처럼. 11살짜리 딸이 재잘재잘 말하는 소중한 이야기들이 저 너머로 빠르게 흘러가는데도 그것을 잡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베이다는 아프다.
베이다는 별 이상이 없다는데도 목에 닭뼈가 걸렸다며 꾸준히 병원을 찾는다. 증세를 아주 상세히 설명하지만 늘 의사는 아무 병이 없단다. 악. 이 마음 알지. 나는 아픈데 의사는 좋은 생각을 하라고 할 때, 병원을 나올 때의 그 헛헛함. 다행히 베이다 곁에는 베이다를 나만큼 이해하는 토마스가 있다. 베이다 아빠가 쉘리 아줌마에게 준 약혼반지를 보고 토마스는 해맑게 '암호 해독 반지냐고' 묻는다. 베이다는 이런 토마스에게 인생에 대해 사랑에 대해 그리고 뽀뽀에 대해 차근차근 이야기한다. 뽀뽀하고 둘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장면에선 내 눈은 잠깐 하트 모양이었다. 뽀뽀 후, 베이다는 토마스를 결혼할 사람 후보에 껴준다. 이때 뿌듯해하던 토마스의 표정이란.
아이들은 바라본 세계에 대해 어른만큼 이해하거나 표현할 순 없어도 오롯이 느끼는 것 같다.
다섯 살 때,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을 기억한다. 할아버지는 병원에서 돌아와 열쇠를 창틀에 던져 놓으며 말했다. "갔어, 가버렸어." 그 허탈한 목소리와 가느다랗게 떨리던 숨소리를 정확히 기억한다. 나는 그 슬픔을 말로 표현할 길은 없었지만 가슴 아래로 무언가 '쿵' 하고 떨어졌던 느낌을 기억한다. 장례 기간에 장난감 자판기를 가지고 놀던 내게 친척 언니가 펑펑 울며 했던 말도 생각난다. "넌 할머니가 죽었는데 슬프지도 않니!" 나는 그때 처음으로 '사람은 죽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였고 할머니를 볼 수 없다는 것조차 실감하지 못할 때였다. 할아버지가 장례식장에 걸어 들어갈 때 친척오빠의 부축 없이는 걸을 수조차 없던 장면도 기억한다. 이 장면들이 또렷하게 기억나는 걸 보면 내게도 그날이 충격적이고 슬펐던 것 같다. 과장법 아니고 10초 전 일도 까먹는 남편은 아홉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은 상세히 기억한다. 그 순간 본인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막막함까지도 기억하더라. 영화 내내 베이다는 잘 아파한다. 그 이유를 나는 알겠는데, 베이다는 잘 모른다.
토마스는 베이다가 잃어버린 반지를 찾으러 숲에 갔고, 벌들에게 쏘여 죽는다.
베이다가 마주한 두 번째 이별. 첫 번째 이별은 베이다가 볼 수 없었고 만질 수 없었지만 이번엔 다르다. 단 한 명의 친구, 토마스가 죽었다. 베이다는 모든 걸 멈추고 방에서 나오지 못했다. 그런데 베이다 아빠는 여느 때와 같이 장례를 ‘치르려고만’하고, 딸의 마음은 돌보지 않는다. 이때 여자친구 쉘리가 뼈때리는 말을 하지.
"살아 있는 것들을 무시하지 마요. 특별히 딸 베이다를요."
나는 이 대사가 영화의 두 번째 방점이라고 생각한다.
베이다 아빠는 아내를 떠나보낸 후 시체를 염하며 함께 죽음에 머물기로 했다. 그가 머문 삶의 방식은 유일한 친구를 잃은 딸의 마음을 헤아려줄 수 없다. 여느 때처럼 이 죽음을 장례식으로 지나가려 할 뿐이다. 베이다가 어찌할 바 모르게 단짝의 죽음을 온전히 느낄 때, 베이다 아빠는 이제 막 겨우 아내의 죽음에서 벗어나고 있는 듯하다. 어른들은 뭔가를 잃으면 빨리 잊으려다 실패하지만 아이들은 일단 찾고, 기억한다. 그러면서 천천히 자연스럽게 기억을 몸에 새기고 그냥 함께 가는 것 같다.
나는 할머니를 기억할 때 더 이상 슬프지 않다. 할머니와 함께한 수영장, 옷걸이 맴매, 스뎅 그릇, 골방의 뱀술 들은 마음속에 남아 있다. 동화 주인공 이름에 할머니 성함을 넣기도 한다. 그 이름 '아지'가 워낙 예뻐서. 남편은 여름이면 아홉 살에 돌아가신 아버님을 기억하면서 콩국수를 자주 먹는다."내 스타일은 아니야"라고 말하면서. 책을 읽을 때도 항상 새벽까지 책을 읽으시던 아버지를 떠올린다. 그래서 대학원 공부를 이어하고 싶다고 했다. 물론 요즘은 차마 아버지처럼 밤까진 못 새겠다고 학문의 길을 포기하고 있지만.
나와 남편은 어릴 때 처음으로 겪은 '죽음'을 다소 상세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기억한다. 상세한 이유는 당시 충격이 컸던 이유일 테고, 자연스러운 이유는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겠지. 글을 쓰는 지금은 두 번째로 영화를 본 건데, 처음 이 영화를 볼 때는 당연히 초록이가 생각났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하며 내가 머문 모습이 베이다의 아빠 같지 않나 생각했다.
요즘은 인생에서 크게 한 텀을 넘은 기분이다. 무엇을, 누구를, 자신을, 건강을 상실하는 일은 언제나 혼란스럽지만 그냥 함께 가도 되는 자연스러운 일임을 이젠 알겠다. 음,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언제나 무엇을 잃을 수 있는 존재인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가 맞겠다. 사실 신에게 되게 화났으면서 괜찮은 척 이 악 물고 버티는 것보다 솔직하게 아프다고 인정하면서부터 속이 좀 시원해진 것 같다.
남편이 "남은 자답게 산다"는 말을 할 때가 있다.
어쩔 땐 그 말이 얄미워 보일 때도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 모두는 생이 붙어 있는 한, 누구 뒤에, 무엇 뒤에 '남은 자'는 맞는 것 같다. 그지, 우린 산 사람이지! 영화는 베이다가 마지막으로 수업에 찾아가 시를 읊고 새로운 친구와 자전거를 타며 끝이 난다.
(이건 모두 딕테이션 할 수가 없어서 한글 자막으로 ㅎㅎ)
눈물 흘리는 수양버들아 왜 넌 항상 울고 찡그리니?
어느 날 그가 떠났기 때문이야?
그가 머물 수 없어서야?
그가 매달렸던 네 가지
그날의 행복을 갈망하고 있니?
네 그늘에서 쉬던 그
그 웃음은 결코 사라지지 않아
수양버들아 눈물을 거둬
네 두려움을 잠재울 무언가가 있으니
죽음으로 영원히 사라졌다 생각하겠지만
그는 언제나 네 마음속에 있을 거야
토마스가 언제나 베이다의 마음속에 있다는 점에서 토마스는 영원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