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릴리와 찌르레기>, 2021
<길모어걸스>를 좋아한다.
스타즈할로우 마을 사람들과 주인공 로리를 함께 키운 느낌이다. 시즌7 마지막 회를 네다섯 번에 나눠, 아껴 보고 그랬다. 왠지 다 보고 나면 이들과 헤어지는 기분에 울적해질 것 같아서. 다행히 10년 뒤 계절별 시즌이 남아 있었고, 내 기준엔 다소 충격적이었던 결말 덕분에 그렇게 슬프진 않았다(작가에게 배려받은 기분까지 들었다!). 왜 이렇게까지 재밌게 봤나 생각해보면, 그 안에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지지고 볶이며 살아냈기 때문인 것 같다. 드라마 초반 마을 사람들이 다 모인 로리 생일파티에서 이미 이 드라마가 ‘내서타일’임을 확인했고, 옆집 고양이의 장례식에서 감동받았으며, 시즌마다 골치 아픈 마을 축제, 바람 잘 날 없는 호텔, 매일 가는 루크 식당, 코 끝이 찡한 로리의 졸업 등 촘촘히 엮인 이들의 삶은 한겨울 무릎에 놓인 실뭉치처럼 따뜻하고 몰랑몰랑하게 느껴졌다. 덕분에 나까지 안전한 기분이랄까.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지향하는 관계는 동료이자 친구 '로렐라이와 수키' 사이인데, 수키 역할의 멜리사 맥카시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마치 성격이 완전 반대인 부부가 한 편의 마당극을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우리 부부가 사는 것처럼.
멜리사 맥카시의 최근 영화가 있더라.
친구가 넷플릭스 영화 <릴리와 찌르레기>를 추천해줬다. 묻고 따지지도 않고 당연히 볼 영화이지만 내용에서 살짝 망설여졌다. 아기를 잃은 부부 이야기라 그래서. 유산 후 슬픔에 절여 있다가 든 생각은 '자식을 잃은 분들은 얼마나 힘들까'였다. 고통과 평생 함께하며 남은 몫을 살아내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유산만으로 이렇게 힘들어했으니 괜히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러다 영화 제목을 검색했는데, 도대체 그 아픔을 어떻게 풀어냈을까 궁금해지긴 했다. 장르 분류가 코미디로 되어 있기 때문! 대체 아기를 잃은 부부 이야기를 어떻게 코미디로 분류할 수가 있는지 이 자체가 블랙 코미디 같았다.
릴리와 잭은 영아 돌연사로 딸 케이티를 잃었다.
남편 잭은 미술 선생님이었고, 당연히 아이들이 많은 학교로 복귀할 수 없었다. 우울증에 시달리다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데, 아내 릴리에게 발견되고 정신과에 가 있다. 치료와 그룹 상담, 활동에 하고 싶은 만큼 적당히 참여하고 아내 릴리와는 화요일마다 만난다. 활동 중에 '케이티'라는 단어가 보이면 하던 일을 멈추고 방으로 들어간다. 아내가 통화 중에 '케이티'만 말해도 전화를 끊는다. 약은 몰래 옷장 속 신발에 숨겨두고 먹지 않는다. 어차피 먹을 때만 효과가 있으니까. 삶에 '다음'이 있을 수 있나 싶고, 딸 없이도 잘 가는 시간이 원망스럽다. 딸이 죽던 날 왜 늦잠을 잤는지 자신을 수도 없이 탓하고, 딸이 꿈에 나오는 순간이 제일 행복하다. 고통의 터널을 솔직하게 지나는 중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통에서 나오기를 미루는 걸 수도 있겠다.
반면 릴리는 잭의 표현에 의하면 '멈출 줄 모르고 앞으로 가는 여자'다.
영화 초반부터 릴리는 초록색 장화와 꽃무늬 장갑을 끼고 밭을 일군다. 케이티가 쓰던 방의 가구들을 어느 임산부의 리클라이너 소파 하나와 바꾼다. 밭을 일굴 때마다 공격하는 찌르레기와 맞서는 하루하루를 보낸다. 어떻게 하면 찌르레기를 소탕할 수 있는지 이것저것 시도하고 그 또한 생명이기에 후회한다. 일터에서 나름 최선을 다하지만 실수 만발이라 좀 걱정이고, 화요일마다 남편을 만나러 먼 길을 운전한다. 남편의 정신과 치료사의 권유로 집 근처 상담사를 찾아갔지만, 그가 직종을 수의사로 변경한 탓에 찌르레기 정보를 더 많이 주고받는다. '딸의 죽음이 고통스럽지만 괜찮아야 하고, 남편의 선택도 놀라웠지만 견뎌야지 뭐. 오늘을 살아야지, 살 수 있어!' 하는 여자다. 어떻게 보면 고통을 외면하는 거 같고, 다르게 보면 고통을 뛰어넘는 여자다.
문제는 둘이 부부라는 점이다.
함께 딸을 잃었는데 해결하는 방식이 정반대다. 우선 둘 사이엔 시간의 의미가 다르다. 잭은 시간이 가는 게 야속한데, 릴리는 시간이라도 빨리 가야 살 것 같은 거다. 그리고 고통에 대처하는 자세도 다르다. 잭은 고통이란 허들을 앞에 두고 넘지 않는다. 그곳에 가만히 서 있다. 반면 릴리는 허들을 뛰어넘고 뒤돌아 보지 않으려 한다. 둘은 꼭 나와 남편 같다. 나는 유산 후 바로 위로하려 연락하는 사람들을 피했다. 아무 말도 필요가 없는 기분인데 자꾸 무슨 말을 듣는 게 싫었다. 이유를 모르겠는 고통 앞에서 누군가 자꾸 이유를 묻거나 위로를 하려 들면 그게 그렇게 잔인하게 느껴졌다. 나에게 '왜 하루가 있나' 싶은 이때, 남편은 하루하루 잘 웃었고 평소처럼 잘 지냈다. 내가 유산 시술을 받을 때 병원 한쪽 벽을 배경으로 성경 본문 요약 영상을 찍어 유튜브에 업로드했더라. 다음날도 어김없이 새벽기도회에 가서 설교를 해야 했고. 나는 제자리에 멈춰 있는데 남편은 혼자 앞으로 잘도 갔다. 그래야 했으니까. 사람들의 위로도 그때그때 잘 받아넘겼고, 굳이 나에게 전해줘서 난 자주 소스라쳤다. 한 번은 남편이 욥기 강해서를 읽고 나에게 추천해줬는데-지금은 그 책을 친구들과 북모임을 하면서까지 애정하며 보고 있지만- 당시 나는 책을 거의 던졌다. "나더러 자녀 잃고, 집 잃고, 소 잃고, 건강 잃은 욥 이야기를 지금 읽으라고?" 하며.
사실 우리가 유산이라는 이슈에서만 달랐던 건 아니다. 원래 달랐다.
가끔 남편과 길을 걷다가 내가 차에 치여 사망해도 남편은 모를 거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하는데, 남편은 주변을 잘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남편은 친한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기보단 여러 사람들과 두루 가볍게 친하고, 누군가 생각나면 그때그때 갑자기 연락하는 성향이다. 융통성 최고요, 변수에 능숙하다. 최대한 모든 일을 뒤로 미루고 미루다 마지막에 '빵' 터트리는 성향이고, 가족들과는 무소식이 희소식인 사람이다. 늘 다니는 길도 일부러 다른 좁은 길로 돌고 돌아가 보는 사람이고, 눈앞에 먹을 게 있으면 옆에 누가 있건 무조건 클리어하는 사람이다(좀 표현이 꿀꿀이 같았나). 그에 반면, 나는 먹을 게 있으면 나 말고 또 먹을 누군가를 위해 반으로 꼭 자르는 사람이고, 골목길은 최대한 빠른 길로 선택해 걷고, 가족들과는 시시 때때 연락하며, 모든 일은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미리 계획하고 움직인다. 사람들과 일대일로 깊게 사귀는 걸 좋아하고 친할수록 예의를 지켜 자주 연락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주변 사람들의 눈초리와 행동 하나하나를 살피고 이유를 찾거나 짐작하길 좋아하는 사람이다. 남편은 머리만 대면 자는 사람이고 나는 불면증이다. 남편은 편안한 성격에 잘 웃고, 나는 예민한 성격에 잘 웃지 않는 사람이다.
제일 다른 점은 통증에 대처하는 자세이다.
나는 통증을 힘들게 앓는 사람이고 남편은 통증을 즐기는 사람이다. 여기서 통증은 몸의 통증뿐 아니라 삶의 통증 모두를 포함한다. 남편은 녹록지 않은 현실을 개척해 살아가는 게 익숙하고 즐거운 사람이다. 그에 비해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모든 안전한 장치를 삶에 구축해놓고 하나하나 대비하고 처리하는 스타일이다. 미래를 상상해보고 계획해야 그대로 되지 않더라도 마음이 편하다. 그러니 우리 둘은 삶에 유산과 같은 '일시 정지'를 받아들여야 할 때 너무 달랐다. 남편은 변수를 즐기며 앞으로 가면 될 때, 나는 변수에 맞아 넘어져 일어서지조차 못했다. 나는 잭처럼, 남편은 릴리처럼.
한 지붕 아래 살면서 이렇게 극단의 끝에 가 있는 부부로 사는 건 쉽지 않다.
나는 문제와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어떤 AI 구조물과 사는 건가 싶을 때도 있었다. 함께 유산을 했는데 왜 나만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의문이 들었고, 유산의 고통이 몸의 변화와 호르몬 변화를 극적으로 느낀 여자만의 것이라면 억울하기도 했다. 정말 그렇다면 임신출산 영역에서 남편들은 무엇을 위해 필요한 존재인가 싶고 그랬다. 그런데 이 영화만 봐도 이건 여자와 남자의 문제라기보다는 사람과 사람의 문제인가 보다. 그냥 서로 다른 우리라는 것.
영화에서 잭이 결국은 릴리를 만나주지 않는다.
면회 사절이다. 그런데 둘의 갈등이 고조된 이때 둘 사이의 해결점이 보인다. 릴리도 꼭지가 돈 거다. 릴리가 면회를 실패하고 주차장에서 미치고 팔짝 뛰며 화를 내게 되는데, 여기서 잭은 조금 감정이 누그러진다. 그리고 이후 릴리가 찌르레기 때문에 정신이 없던 차에 잭이 전화를 걸자 그동안의 설움을 대폭발 하는데, 이 목소리를 듣고 잭이 울고 웃는다. 나는 여기서 무릎을 쳤다. 릴리가 울고 화내자 웃는 잭을 보고 공감한 내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분명 이 영화도 부부의 갈등이 해결되는 지점을 여기로 그린 건 확실하다!
내가 딱 그랬다. 고통에 대해 나만 말하는 것에 지쳤고, 제발 남편이 자신의 이야기를 해줬으면 했다.
그런데 문제 앞에서 늘 괜찮다고, 이겨낼 수 있다고 잘 웃는 남편이 미웠다. 남편도 화를 내면 좋겠고, 자신이 느끼는 현재 감정을 제발 한 문장으로라도 듣고 싶었다. 유산이라는 어두운 터널조차 평소처럼 지나가려는 남편에게서 듣고 싶었던 말은, "나도 힘들어!"라는 포효였다랄까. 그러다 어느 날 남편이 소파에 앉아 TV를 보다 말했다.
“나도 유산이 처음이라 어떻게 하는 게 맞는 건지, 우리에게 나은 건지 몰랐어."
나는 숙제처럼 미룬 욥기 강해서를 읽을 때가 온 것 같았다. 그리고 면지에 적힌 남편의 메시지를 먼저 읽었다.
남편이 "어쩌겠나, 힘을 내자" 했던 자꾸 '앞으로 나가자' 식의 권면이, 쉬운 것만은 아니었구나.
아마도 (신에 대한) 무지와 (우릴 향한 신의) 무심, (신을 향한) 원망과 자책 속에서, 신과 동행하는 중에 나온 의지였구나. <박영선의 욥기 설교>(무근검) 이 책은 아무 이유와 조건도 없이 찾아온 고통 앞에 인간이 신 앞에 항복해가는 여정, 신이란 존재를 알아가는 과정이 인생이며, 아마도 우리 삶에 고통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 전한다. 이 메시지를 총 34 챕터로 나눠 이야기하고 있는데, 정말 읽는 것 자체가 행복한 고통이기도 하더라.
우리 부부는 유산 이후 잭과 릴리처럼 지난하고 험난한 시간을 보냈다.
뒤돌아보면 둘 다 눈 양옆을 가린 경마장 말처럼 각자 눈앞만 보고 날뛰며 살았다. 감정의 골이 깊었다. 서로의 얼굴은 싸우라고 보는 거였다. 그러다 내 몸 어느 한 구석 아프지 않은 곳이 없어진 덕분에! 우린 어쩌다 다시 대화를 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나도 살긴 살아야 했나 보다. 죽을 듯이 살면서 남편에게 도와달라 손을 내밀었으니까. 남편이 감당해야 할 집안일들이 늘면서 나는 미안해졌고 남편은 그래도 괜찮다 했다. 어느 날엔 이대로 살다가는 남편에게 짐이 되고 짜증이 되겠다 싶어 친정에 가서 지내기도 했다. 요즘은 몸이 차차 나아지면서 종종 함께 밤 산책을 한다. 코로나 기간이어도 목회자는 생각보다 바쁘다. 더구나 남편은 학교도 다니고 있어 평소에 둘이 잔잔한 수다를 떨기엔 시간이 부족하다. 그래서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고 산책이 가능한 날이면 나는 괜스레 신이 난다.
최근 남편은 "집안일이 많아 나도 더는 못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나는 기꺼이 그 선언을 지지했다. 남편이 자기 이야길 해줘서 좋았다. 왜냐하면 매일 "너는 하지 마. 내가 이따 다 할게" 하고 남편은 대부분 까먹었기 때문에…. 차라리 남편이 애초에 안 한다는 게 나았다! 무엇보다 남편이 힘들다고 먼저 말해줘서 고마웠다. 이후 나도 설거지를 위해 아침마다 스트레칭을 한다. 설거지 후에도 스트레칭을 한다. 이렇게 열심히 다시 집안일을 시도해보고 그렇게 하고도 안 아픈 날에는 스스로 너무 기특하다. 대신 아직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낼 수는 없어서 빨래 너는 일은 남편이 한다. 아무래도 위기 앞에서 부부 중에 덜 아프고 덜 예민한 사람이 기다리고 끌어주게 될 텐데, 내가 아닌 남편이 그 입장이라는 게 미안하고 짠하기도 하다.
고마운 마음에 나름 내 몸의 한계를 뛰어넘은 날이 있다!
제주도에서 동쪽바다를 실컷 구경하는 중에 남편은 계속 산이 보고 싶다 했다. 바다 일정에 갑자기 산타령을 하는 게 너무 남편다워 웃음이 났다. 남편이 그렇게 원하니 나도 산에 가야겠다 생각했다. 당시 평지 말고는 걷기가 어려울 때라 가장 낮은 오름을 검색했다. 그리고 남편이 좋아하는 일몰 시간에 오름에 올랐다. 오르기 직전까지도 과연 내가 살아 내려올 수 있을까 속으로 엄청 걱정했다. 남편은 계속 안 가도 된다고 했으면서, 오름을 오른 후 “다 이루었다!”라며 좋아하더라. 그날 난 오름을 거의 기어 내려왔다.
사실 몸이 지금보다 더 나아지면 좋겠다.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희망해본다.
언젠가 남편에게 지금처럼 빚지는 날들을 청산하고 싶다. 크게 한 턱 쏘고 싶다. 그래서 남편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내가 나중에 오빠 떵 닦아줄게."
그냥 지나가는 말이 아니고, 우리 부부는 언젠가 남편이 나보다 훨씬 아플 수도 있다는 상상을 자주 한다. 사실 남편은 나보다 심장이 더 약한 사람이다. 심장이 당장 내일 멈춰도 이상할 리 없는 병력이 있는 질환자다. 그럼에도 이렇게 내 하루에 최선을 다해주니 내가 저런 말을 약속할 수밖에.
우리는 앞으로도 같은 상황에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선택을 할 테지만, 그래서 서로의 속을 벅벅 긁게 되겠지만, 덕분에 삶을 넓게 향유하고 서로가 아니면 보지 못할 세계를 경험하겠지. 한번 이렇게 살아보는 것도 멋진 일 같다! 이 집에 나와는 정말 다른 종류의 인간이 산다! 흥미롭군!
그냥 갑자기 좋은 점을 찾아 적어봤다.
잭은 릴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간다. 둘이 헬멧을 쓰고 찌르레기의 공격 속에서 밭일을 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릴리와 찌르레기> 장르 분류가 왜 '코미디'인지 굳이 덧붙이자면, 보통 부부가 위기에 대처하는 모습이 언제나 블랙 코미디 같아서일까. 우리처럼.
오늘 남편은 발바닥 사마귀 제거 후 염증이 생겨 걷지 못하는 내게 밥 먹고 산책하자고 두 번이나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