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 사는 장 언니, 안녕.
서울엔 완연한 가을이 왔어! 실은 한 달 전부터 가을을 물씬 느꼈어. 내가 잔기침이 많아졌거든. 항상 이맘때쯤 비염과 기관지염이 번갈아 찾아와, 공기가 차갑고 건조해지는 걸 몸소 느끼지. 이제는 이렇게 지나가는 계절에 몸이 미처 적응 못해 버벅대고, 시원한 바람에 손수건을 목에 두르는 나이가 되다니! 겨울을 맞이하는 게 벌써 두렵기도 해. 내 나이 겨우 서른다섯에 말이야! 언니, 미안.
한겨울도 아닌데 을씨년스러운 계절 맞이하듯 벌벌 떠는 나는. 그래도 사람들을 만나고 싶고, 거미줄처럼 걸쳐 놓은 해야 할 일도 많은데, 왠지 아무것도 엄두가 안 나는 거 있지. 몸이 아프니까 생각도 좀 느리고, 반응도 느리고, 업무도 무리해서 하지 않으려다 보니, 더욱더 느려진 기분. 모든 게 앞으로 치고 나갈 때, 나만 천천히 움직이는 느낌이야. 그러면서 조금씩 혼자 자존감을 갈아먹는 중이었던 것 같아. 아무도 없는 골목을 천천히 산책 중인데 뒤에서 회초리를 든 할머니가 쫓아오는 기분이랄까. 내 속도와 방향을 유지해도 될 텐데. 몸이 좀 삐걱대는 프리랜서로 사는 일은 꽤 위축되는 일인 거 같아. 나 빼고 모든 사람의 말과 행동에 이리 휘청, 저리 휘청 해. 엄청 방어적이 되었어, 내가.
생각에도 마음에도 렉이 한 번 걸리면 당최 앞으로 잘 나아가질 못해. 며칠을 '내가 이런 나라서' 답답해하다가 늘 그렇듯 SNS를 켰어. 그런데 요즘따라 알록달록한 단풍 사진이 많더라! 몸은 계절을 알았는데 실제 집 밖 풍경이 단풍단풍할 거란 생각은 왜 못했는지! 친구들이 건강하고 예쁘게 잘 지내는 사진을 보면, 할머니가 손주 사진 가만히 보는 것처럼 나도 그러게 돼. (아이고야ㅋㅋㅋㅋㅋㅋ) 가만히 보면서 '여기는 워디여?' 하는 거지. 그래서 나도 오늘은 웅크린 태도를 청산하기로 했어. 꼭 내 두 눈으로 청명한 가을을 보고 싶어졌어! 점심을 먹고, 집 앞 공원엘 갔지.
공원에서도 가장 끝, 내가 좋아하는 그곳으로 갔어. 그곳은 내 기준 '우리 동네 10대 명소'가 있거든! 서울숲처럼 높은 은행나무가 양옆에 쭉 뻗은 그런 세련된 길은 아니고. 작은 호수 아니, 연못 위에 크리스마스트리가 몇 그루 있어. 이쪽에서, 저쪽에서 보아도 틀림없이 크리스마스트리지! 그곳에 가면 사람들은 그냥 벤치에 드문드문 거리를 두고 앉아 그 나무를 봐. 가끔 그곳에 함께 앉은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데, 이건 나만의 착각인 건 확실해. 나만 그런 느낌. 일단, 이 장소를 한번 구경해. 이런 덴 제주도에도 없지 않겠어? 홍홍.
미리 크리스마스!
어때? 정말 크리스마스 같지 않나? ㅎㅎ 내 기준에, 우리 동네 사람이라면 가을에 꼭 한 번쯤 이 앞에 와봤으면 좋겠는데. 사실 앞에 '서울 사람들'이라고 썼다가 지웠어. 사진에 보이는 부분이 다거든. 그리 넓지가 않아. 순간, 곳곳에 오름 정원을 둔 언니 앞에서 그냥 공원의, 연못 위의, 나무 몇 그루를 자랑하는 내가 되게 없어 보인다. ㅎㅎ 그래도 말이야? 주홍빛으로 물든 나무 자체도 예쁘지만 그 앞이며 뒤며 늘어진 버드나무도, 햇볕에 타는 갈대도 나는 너무 아름답게 느껴져서 말이야! 그리고 심지어 저기 바로 앞에 바둑을 두는 어르신들이 많은데, 그곳은 마치 '퀸즈갬빗'에 나오는, 어르신들이 모여 체스를 두는 유럽 어느 공원이 따로 없다구! 근데 전에 엄마랑 공원에 온 적이 있는데, 이곳을 깜박하고 지나쳤던 게 생각나네. 엄마한테 친정 근처 공원이랑 비교 분석하면서 설명하다가, 엄마 표정이 뭔가 딱 2% 부족한 게, 진 기분이었는데. 여길 왔어야 했어!
근데 언니,
이렇게 나만 알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혼자만 봐서 아쉬운 기분 아나? 괜히 생각나는 사람 있잖아. 실은 남편이 제일 먼저 생각나긴 했어. 남편은 여길 모르거든. 낮에 나 혼자 오니까. 아까 말했듯이 엄마 한번 보여드렸어야 하는데 아쉬움이 남고. 그리고 한 사람이 생각났어. 내가 어릴 때 매일 할아버지와 공원 산보를 했거든? 할아버지는 만보기를 차고 매일 식후 '만보 산보'를 하셨던 분이야. 무뚝뚝한 우리 할아버지는 그래도 같이 사는 손녀에겐 사랑을 듬뿍 주셨던 분이지. 근데 언니! 그렇다고 그 사랑이 무한하진 않았어. 그렇게 자주 공원을 걸었는데, 솜사탕은 딱 한 번 사주셨거든. 이후로 몇 년을 같이 다녔는데 얄짤 없었어. 솜사탕 아저씨 앞에만 서면 내가 떼쓰기도 전에 "저번에 다 남겼잖아" 하셨지. 그 저번이 대체 언제지! 그때 나는 약간 내 어린이 인생에 첫 '인내'를 배웠던 것 같아.
그러고 보니, 우리집이 분가를 하고 난 후에는 한 번도 공원에 할아버지와 간 적이 없네. 언제 한 번 일요일, 할아버지가 집에 오신 적이 있어. 함께 밥을 먹은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후엔 내가 교회에 간다고 했던 것 같아. 어쩌면 매일 손녀와 함께 가던 공원에 한번 가볼까 하고 오셨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곁에 계실 때 더 잘해드릴걸' 하는 마음은 오늘도 여전하고, 가끔 꿈에 할아버지가 나오면 그렇게 눈물이 나. 김가네 김밥이 의외로 맛있다고 말씀하셨을 때, 아파트 상가 청국장 가게 주인이 단번에 할아버지를 알아봤을 때, 마음이 '쿵' 하기만 했지, 밥통에 밥 해드리고 올 생각을 왜 못했을까! 그때 난 너무 어렸어! 라고 하기엔 20대 초반이었.. 막내 아들에겐 별 말 없고, 며느리에게도 살가운 말씀 한 번 해주시지 않고, 10년 터울 내 동생, 막내 손자 품에 안고도 크게 웃지 않던 할아버지지만. 난 그냥 그 존재가 우리를 품 안에 품던 시간이 그리운 거 같아. 그러고 보니, 언니한테 조부모님 이야길 들어본 적은 없는 것 같네. 언제 한번 얘기해줘. 물론 하고 싶으면!
근데 실은 언니,
언니에게 그냥 하루하루 어떻게 지내는지 적어보면서, 삶에서 배운 인생 첫 경험을 나누고 싶었거든? 아까 말한 '인내' 이런 거. (이글이글 눈빛 발사) "사실 성경에 나오는 아홉 가지 열매에 대해 적어보고 싶기도 했어." 근데 적다 보니까 내용이 별로 그런 것 같진 않다. 전화로 먼저 상의를 깊게 했어야 했는데. 우리는 그때 "근데"를 남발한다는 발상을 흥미로워만 하고, 이후 일절 대화가 없었네. 언니도 수업하랴, 스튜디오 차리랴 바쁘지? 나도 이래저래 바빴어. 그렇지만 내일이라도 당장 전화를 걸어서 아무렇지 않게 "근데 언니"라고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은 것 같아. 글이 예상처럼 흘러가지 않아도 괜찮아!
언니, 답장에는 말이야. 처음 인내를 배운 순간을 말해줘도 좋고, 조부모님 얘기를 해줘도 좋고, 그냥 제주도 내일의 가을을 이야기해줘도 좋겠어! 아, 그리고 문득 생각해보니, 나는 언니를 언니라고 하는데, 언니는 나를 뭐라고 해야 할까? 고민이 좀 되네. 언니는 말하면서 꼭 내 이름을 부르잖아! 나는 언니라고 하고. 뭐 알아서 불러줘! 부르지 않아도 되고! 매거진 참여 신청하면 가능한 것 같아. 기대할게! 유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