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장보영 작가의 아래 글에 대한 답장입니다.
언니, 안녕. 오랜만이야.
첫 번째 편지를 쓰고 벌써 2주나 지났네. 그 사이 언니의 답장을 받고 지금까지 난 언니에게 무슨 말을 할지 고민했던 것 같아. 사실 너무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아껴야 할 것 같고, 더 좋은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싶어 당장 적질 않게 되더라고. 약간의 역효과도 있었는데, 언니와 시시 때때 연락을 하는 중에 은근히 감추는 거야. 그러니까, 나중에 편지에 적으려고 당장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일단 참는 거지.
근데 언니. 이게 처음엔 역효과처럼 느껴졌다가 나중엔 나름 좋다는 생각을 했어. 이유는, 내가 순간 복받치는 감정과 속상한 마음을 일단 멈추고 도정하는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거든. 언니는 내가 홧김에 하는 말을 듣고 싶다고 하지만, 몇 번 언니에게 '똑땅하다' 말해놓고 뒤돌아 부끄러웠던 적이 종종 있던지라. 가령 나 때문에 목회자들의 세상이 곡해되어 전해질까 봐 두려울 때도 있었어. 사실, 내가 느낀 바가 사실이 아닐 때도 있는데 말이지. 아무도 나에게 '그러라' 강요하지 않아도 굴레 속으로 들어가는 나는, '일상에 압박받고 있다'고 오해 살 만한 말과 행동을 하는 거 같거든. 그런데 나는 남편 옆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일들을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이고 질 때가 많아. 보통 이런 나를 보며 언니는 걱정을 하는 거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하고 싶었음.)
그리고 또 하나 새롭게 다가온 점은 우리가 진짜 자매 같았단 거야. 이미 언니에겐 두 명의 든든한 언니들이 있지만, 나에겐 언니가 없잖아? 근데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나는 마치 언니랑 한집에 사는 느낌이 들었어. 그 느낌이 뭐냐면, 언니가 제주도로 출장을 다니느라 바쁜데 말이지? 어느 날 우리가 함께 쓰는 방구석 서랍에 언니가 깜짝 편지를 넣어놓고 간 거지. 그날부터 우리가 함께 입는 주홍 스웨터와 밤색 코듀로이 바지 사이사이에 편지가 쌓여가는 느낌이랄까. 언니는 제주도에 가고 없지만, 혼자 남은 방에서 편지를 펼치면 너무 따뜻해지는 거지. 방금까지 서늘했던 마음이 녹아버리는 거야. 나는 예전부터 언니의 따뜻한 말들로 서늘한 시절을 버티고 있는 것 같거든.
언니처럼 마음을 읽어주는 일은 정말 중요한 것 같아. 내가 이런저런 사람인 걸 언니가 알아줄 때 받아들여지는 느낌이 나는데, 이건 휴대폰 배터리 충전과도 같거든. 힘들 때면 당장이라도 제주도 비행기 티켓을 끊고, 버스를 타고, 언니가 수업하는 교실로 뛰어가고 싶은 지경이야. 언니 수업을 듣는 아이들은 얼마나 좋을까! 물론 난 수업에 갈 수 없는 대신 언니와 통화를 하지. 나는 가끔 초라하고 어색하게, '할 말은 하고 싶거던여!!'하는 어느 사회 초년생처럼 찌그러지곤 하는데, 전화기 너머 언니가 "나두 그래…."라고 속삭여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언니와 통화를 하면, 마음에 튼튼한 새 살이 오른 덕분에 여럿 박혔던 화살촉이 '팅, 팅'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지는 기분이랄까. 언니의 존재를 정말 고맙게 생각해.
근데 언니. 주중에 언니로부터 글을 봐달라고 연락이 왔을 때, 나는 인쇄소에 가는 길이었어. 조금은 바쁘고, 조금은 마음이 두근두근했던 날이었는데. 언니가 보내준 글이 3개나 되는 거야! 앞서 언니가 보낸 카톡에 '세 가지 파일 형식의 글'을 대충 읽은 바람에, '세 개의 글'인 줄 알았어. 버스 안에서 안구에 힘을 빡 주고 글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냐면. '두 번째 글 가운데 부분이 좋네?' '근데 아무래도 세 번째 글이 다른 글보다 낫겠어.'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을 했어. 근데 답장을 보내려니 사실 그 차이가 좀 미미한 거야. 솔직히 말하면 세 개의 글이 서로 뭐가 크게 다른지, 결말 부분도 다 비슷하고 모르겠는 거지! 그리고 다시 언니의 앞선 톡을 읽었는데 세 개 글은 같은 글이고, 파일 형식만 다른 거더라고….
근데 언니, 덕분에 나는 약간 긴장되었던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어. 인쇄소 초행길이었고, 요즘 일할 때 늘 긴장을 하거든. 그런데 중간에 언니의 런던 여행기를 아주 샅샅이 읽는 바람에 잠시 런던에 다녀왔잖아? 내가 워낙 안 가본 지역, 특히 서양 내음 나는 글을 좋아해서 여러 번 읽는 게 싫지 않았어. 물론 언니는 '런던의 음식은 눈물 젖은 김밥'이라는 맥락으로 런던을 그려줘서 글에서 김가네 냄새가 물씬했지만. 그래도 덕분에 인쇄소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언니의 런던 여행 속에 함께 있었을 내 남편의 지분을 가늠해보고 언니와 이야길 주고받으며 우린 또 그렇게 오래전부터 연결되었음을 실감했어! 전에도 말했지? 내가 남편 만나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가, 남편 친구인 언니를 만난 거라고. 결혼 전부터 남편을 매개로 서로를 궁금해하고, 언니의 싸이월드 게시판을 기웃했던 날들이 생각나. 그때나 지금이나 언니는 글을 쓰고, 가르치고 있네. 정말 이 순간, 언니가 소스라치게 한결같고 성실하다고 생각해. 그러니 어쩌다 마감을 잊고, 때로 글쓰기를 미루는 언니 스스로를 자책하지 말길 바라. 그런 언니 덕분에 나도 아직 글을 쓰고 있잖아. 이 고마움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까!
오늘은 있지. 교회에서 세례, 입교식이 있었어. 아마 처음 말하는 걸 텐데, 유산 후 첫 세례식 날, 나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어. 나와 비슷한 시기에 임신했던 분들의 아기들이 천사처럼 앞에 있는데 그 모습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예쁘더라고. 그날을 간신히 보내고, 반년이 지나 다시 세례식이 온 거야. 이번에는 설마 안 울겠지 했어. 내게 세례 받을 자녀가 없다고 슬퍼할 시간이 없었거든. 나와 남편이 6년째 맡고 있는 중고등부 아이들이 만 15세가 넘으면서 세례, 입교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야. 지난번 세례식 때 많은 부서 아이들이 세례와 입교를 거절했기 때문에 좀 충격적이었거든.
중고등부에서 만났는데 벌써 군대 제대를 한 아이들도 있어. 중학교 1학년 때 만나 고등학교에 진학한 아이들도 있고. 특별히 이 또래들에 마음이 가는 이유는 얘네 인생의 고비(?)와도 같은 큰 결정 속에 나도 함께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 예를 들면, 대학을 정하거나 군대 가는 시기를 정할 때, 아니면 고등학교를 인문계로 갈지 상업계, 예술계로 갈지 결정하는 순간에 나도 아이들과 함께 고민을 했거든. 자소서를 도와주기도 하고, 과연 이 결정을 내가 지지하는 게 맞을지 두렵기도 했던 것 같아. 이렇게 아이들 주변 환경이 변하고, 생각이 자라는 걸 옆에서 지켜보면서 나도 함께 자라는 것 같아. 물론, 애들은 별생각 없겠지만.
최근 부서 한 아이와 함께 밥을 먹고 서점에 갔어. 그리고 그날 우린 세례 받는 것의 의미를 같이 고민해봤어. 그 아이는 어릴 때 유아세례를 받고 이제 입교할 차례인데, 믿음에 대해 질문이 많은 아이였거든. 나는 최근 읽은 책에서 말하는 세례에 대해 이야기해줬어. 세례는 우리 편에서 받고 싶다고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아니라, 신의 편에서 결정되고 선택된 사항을 우리가 고맙게 받는 것, 정체성을 확인하는 자리라는 것. 특별히 한 사람의 세례는 교회 공동체가 다 함께 준비해야 하고, 교회 가족은 믿음의 고백에 대한 증인이 되는 것이라고. 세례의 참모습에 대해 나도 이제야 책을 통해 하나씩 점검하게 되었다고 그 친구에게 전했어. 그런데 말하면서 느낀 바, 지금껏 내가 경험한 세례식이 과연 그랬던 것 같아. 예를 들면, 아이 한 명이 세례를 받으면 모든 부서 아이들이 그 예배에 참여하고, 마지막에 단체샷을 꼭 찍어야만 하는 순간이 그렇게 다가왔어. 쑥스러워하는 한 명을 가운데 두고, 나까지 쑥스럽게 갑자기 떼샷을 찍는 그 의식이 말이야. 무슨 축제 같으면서 돌상 기념 같기도 한, 가족 행사 같았거든. 그러면서 교회 안에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모였다는 걸 실감했다랄까.
그리고 오늘, 그 아이는 입교를 했어. 간증문을 읽었는데, 고1 학생이 쓴 글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깊고, 현실적이었어. 믿음에 대한 의심과 회의감, 신은 없을 거란 확신과 질문에 대한 답을 수많은 인문 서적과 다양한 세계관 속에서 찾던 그 아이는 이제 많은 부분을 성경에서 찾게 되었대. 의심하던 자신을 다시 믿음의 여정 속에서 정돈하기 시작했단 이야기를 듣는데 갑자기 나는 부끄러워졌어. 그동안 이 친구를 위해 아이 엄마와 나, 남편이 함께 기도하고 준비한 거사가 해피엔딩처럼 고스란히 그 자리에서 열매를 맺는 듯한 순간이었는데 말이야. 세례식이 끝나고 아이의 엄마로부터 거듭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나는 숨고 싶어졌어. 뭐랄까. 오늘의 나는 세례식에서 반짝거리는 새 아기를 보고 또 눈물이 맺히는 수준의 사람이었거든. 실은 내 인생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데, 괜히 오늘이 서로에게 엄청나게 기억되는 게 부끄럽더라고. 이런 내가 신앙 고민을 함께 한답시고 데려다놓고 전한 '믿음 같은 말들'이 위선적으로 느껴졌어. 나는, 내 믿음이나 돌아봐야 하지 않나? 하는 한심한 생각이 몰려왔지. 이런 나도, 이렇게 계속 넘어지는 사모도 교회는 가족으로 받아주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다 입장을 한번 바꿔 보았지. 이런 나 같은 사람이 본당 한구석에 또 한 명 있다고 상상해보는 거야. 한 곳에 너무 오래 있어 곪고 다치고 썩은 듯한 현) 내 모습이 남들에게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봤어. 오늘 세례식에 참여한 많은 성도들이 나보다 훨씬 오래 이 교회에 다녔고, 훨씬 많은 인생의 희비와 고락을 이곳에서 겪었을 텐데. 그들은 서로를 비난하고 배척하기보다는 그냥 잠깐 싸웠다가, 결국엔 서로 용납하고 못난이 가족으로 함께 지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데 몇 분 걸리지 않더라. 게다가 나보다 몇 배 나이 많으신 어른들은 다 알겠지, 지금 이런 나를. 애써 잘 살아보려 하는, 그래서 아직도 어쭙잖게 인사를 건네는 손주뻘 사모를.
얼마 전에 집에 친구 동생이 놀러왔어. 그 친구와 먼저 약속을 잡고, 내 동생도 초대했지. 내 동생과 밴드를 하는 친구인데, 목회자 자녀거든. 그래서 우리는 이미 서로에 대한 소식과 정황만으로도 연결된 기분을 몇 년째 느끼다가 이제야 만난 거야. 그 아이는 우리집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부터 나갈 때까지 조잘조잘하고 싶던 이야기를 했어. 음악을 하는 친구라 그런지 내 등 뒤에 울리는 시계 초침 소리마저 정겹고 좋다고 할 정도로 섬세하더라. 그 옆에서 내 동생은 시계 초침 소리에 대한 가사를 얼마 전에 썼다고 맞장구를 치질 않나. 정말 뭇 20대 남성이라 하기엔 너무 섬세한 결을 가진 소중한 친구들이었어. 우린 구수한 된장찌개와 숙주가 가득한 차돌박이를 쪄 먹고 빼빼로를 한두 개 먹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수다를 떨었어. 무려 나와 10살 차이가 나는 내 동생과 동생 친구는 세대를 막 가로지르며 '문방구 앞 게임기' 같은 데서 서로의 공통분모를 찾았어. 그리고 우리를 낭만세대라 여겼지. 애들이 가고 난 무려 두 시간 낮잠을 잤어. 아무래도 피곤했나 봐.
테이블에 남은 와플과 빼빼로를 치우며 친구 동생이 한 말이 생각났어. '동생 하나 더 생겼다 생각하세요.' 그냥 지나가는 말일 테고, 워낙 남자애들이 시원시원하게 흔하게들 하는 말인데. 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더라고. 어느 김해 한 교회에서 '사는 게 뭔지' 하며 기타를 치며 자란 아이가 우리집에 와서는 자신의 역사를 읊어주는 게 그리 흔한 일은 아니잖아? 이렇게 또 그냥 가족처럼 지내게 되는 거지. 맛있는 걸 하면 불러서 함께 먹고, 크리스마스 즈음이면 크리스마스라 부르고, 생일이면 생일이라 부르는 그런 사이가 되는 일은 그리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더라고.
나는 이런 게 좋은 거 같아, 언니. 교회서 혹은 일터에서 좋게 평가받아 칭찬을 듣는 일보다 그냥 '나도 그래, 너도 그래?' 하는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고, 잠깐 쉬어갈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제공하는 일. 함께 생각을 공유하는 자리가 좋아. 지금은 이게 딱 내 역할 같아. 칭찬을 들으면 앞으로 더 달리고 싶고, 그래서 또 무리하고 욕심내는 게 나라서. 그러다 또 고갈되고 결국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사람이라는 걸 실감하는 일이 더 많은 것 같거든. 적어도 교회 마당, 이 집에 사는 동안은 계속 이렇게 무리하지 않으며 살 생각이야. 이렇게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어디서 깨지고 넘어져 오는 사람들도 만나기 마련인데, 난 정말 해줄 얘기가 많거든. 내가 열심을 내다 무너지기 쉬운 사람이라 그런지. 치부가 드러났던 부끄러운 순간, 와장창 무너졌을 때의 수치감을 또렷하게 기억해. 나는 누군가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속상해하면, 무력한 기운이 걷히고 다시 무언가를 해내는 일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까지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아. 중요한 건, 내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니까. 어떤 일이든 일에 대한 기본기는 당연하지만, 일과 사람,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따로 익히고 훈련해야 하는 것 같거든. 이 모든 게 조화롭기 전까진 잘되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고, 그래. (내가 못하니까!)
메인에 걸어둔 사진은 일본 드라마 <35살의 소녀>인데, 10살에 당한 사고로 25년 동안 의식이 없다 깨어난 35세 소녀의 이야기야. 이 드라마가 좋았던 이유는, 가족 간에 결국 서로의 존재 외에 중요한 건 없다는 걸 깨닫게 해줬기 때문이야. 드라마 속에 많은 갈등 구조가 있지만, 종국엔 10살 정신연령 수준의 35세 주인공에게 이들이 요구하는 건 그냥 '너답길, 행복하길' 이었거든. 결국 가족은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가 더 중요해야 하는 사이 같아. '그래야 한다'고 적은 이유는 그러지 않는 가족이 분명 많으니까. 그런데 언니, 나는 어린 시절에 아빠가 무슨 일을 하는지 한동안 알 수 없었거든? 도대체 궁금했지만 아무도 알려주질 않아서 알은 체하지 못했어. 그리고 드디어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기뻤어. 아빠가 힘들어도 성실하게 사는 것 같았거든. 그런데 아빠는 당신이 하는 일을 딸인 내가 알았을 때 수치스러워했어. 사람마다 자신의 기준과 잣대, 가치가 달라서 말이야. 무슨 일을 하는지가 서로에게 중요하기엔 애초에 시작점이 다른 게 아닌가 생각해봤어. 그러니까 우린 서로 그냥 '잘 지내는지' '건강한지'까지 묻고, 평가하지 않고, 사랑해주는 가족이 필요한 것 같아.
너와 내가 '우리'로 묶이는 지점이 좋아. 그리고 우리집에 온 사람들과 평가를 제한 말들로, 언니 말처럼 서로 '오글거리게' 위로하며 응원하고 싶어. 그리고 이렇게 오글거리게 엮이는 사람들과 또 다른 가족이 되어 살아가는 거지. 옛말에 수저 하나 더 놓음 가족이 되는 거라고 하잖아. (맞나?) 임신했을 때 우리집 문 앞을 채우던 택배 상자 안에는 과일, 여러 종류의 국 등 먹을 게 가득했거든. 하나씩 꺼내 먹는 재미와 고마움이 넘치던 시절이었어. 유산했을 때는 그보다 두 배 되는 음식들이 냉장고에 채워졌지. 나도 이젠 누군가 생각이 나면 안부를 묻고, 혹 아프다고 하면 종합비타민 한 상자 보내주거나 사골 곰탕을 보내주는 사람이 될래. 이렇게 튼튼하게 마음에 살이 채워져서 내년 세례식에는 부디 천사 같은 아기들을 보고 눈물이 맺히지 않았으면 좋겠어!
근데 언니.
"우리도 그런 가족이 되자!" 라고 쓰려고 보니,
우리는 이미 오글거리는 가족인 것 같아서 참 좋다!
P.S.
마음이 살짝 몰캉해진 오늘 언니가 준 택배를 뜯어보았어! 근데 또 소오름…. 언니 나 미도리 문구 완전 죠아해. 몇 년째 여기 다이어리만 쓰고 있었거든!
언니 정말 고마워, 달력 요망지게 잘 쓸게!
*메인 이미지 출처: NTV 공식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