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이 깊어져서 일주일만에 일어나 씻었다. 이맘때면 어김없이 마음에 어둠이 드리운다. 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내가 가진 모든 것 중 내가 이룬 건 아무것도 없으며 아무도 나를 떠올리지 않는다는 터무니없지만 강력한 생각이 머릿속을 채운다.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어 모래먼지를 일으킨다. 새해 다짐을 도모하는 사람들이 보기 싫어 세상과 나를 차단해 자발적인 외톨이가 된다.
말려있는 실타래. 엉킨 목걸이. 꼬인 스텝. 우리는 이런 걸 고치고싶어 한다. 눈엣가시인 존재를 부정하고싶어 한다. 더럽거나 거슬리는 건 없는 취급하고싶어 한다. 그 생각이 이어지면 결국 내가 내 존재를 없애 버리는 것이다. 움직임을 최소화해 없는 존재가 되어 세상을 깨끗하게 한다는 생각이다.
칠레의 미술작가인 세실리아 비쿠냐의 대표작은 천장에서 바닥까지 길게 늘어뜨린 천의 모음이다. 비쿠냐의 실은 멀리서 본 삶 같다. 한 가닥 한 가닥이 기억의 모음집 같은 모습이다. 얼기설기 다른 천에까지 매달려 꼬여서 하강하는 부분이 있느가 하면 어떤 천은 한 번 작게 꼬인 채로 제법 매끈하게 떨어진다. 멀리서 보면 어떤 천이 꼬였고 어떤 천이 매끈한지 구분이 안 간다.
비쿠냐는 디아스포라 정체성, 식민주의, 페미니즘 같은 사회적이고도 개인적인 문제를 자신의 언어로 풀어낸다. 그뿐 아니라 미술을 비롯해 시, 영화 등의 매채로도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은 다각도로 해석될 여지가 차고 넘친다. 수많은 해석 해석 중에서도 내게 ‘키푸’ 작업은 위로였다. 우울이 오물처럼 덕지덕지 묻은 상태에 나에게 비쿠냐의 작업은 하늘에서 내려주는 동아줄 같았다. 그리고 좀 더 오래 들여다보니 내 일기장이 생각났다.
연말이면 한 해 동안 쓴 일기를 톺아본다. 어떤 달은 일기를 한 줄도 쓰지 않고 지나간 반면 어떤 달은 매일 신난 채로 수다스러운 글자가 이어진다. 꼬이면 꼬인 채로 멋진 것들이 있다. 어지러운 일상도 멀리서 보면 비쿠냐가 꼬아 만든 천처럼 신비롭고 아름답기만 하다. 그러니까 나는 연말 연초, 모두가 새로운 다짐과 지나간 시간에 대한 반성으로 조금 들뜨고 한층 깊어지는 때가 오면 누군가 이렇게 말해주길 기다린다. 존재만으로 충분하다고. 그러니까 지금 당신이 어떤 상태든, 해피 뉴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