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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재 Dec 24. 2023

반복이라는 서프라이즈, 엘리자베스 와일드

나는 매일 언어에 푹 절여져 산다. 아무리 탐구해도 절대 질리지 않는다. 타고난 성향과 오랜 습관이 그렇게 만들었다. 내 핸드폰 설정은 스페인어다. Detener(멈추다) 버튼을 찾아 눌러 알람을 끈다. 화장실을 다녀와서 아라비아 숫자로 된 시간을 읽는다. 난 영어로 된 에세이와 전시 카탈로그를 줄을 치고 단어 뜻을 찾아가며 읽는다. 까딸루냐어 간판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뜻을 유추한다. 가게에 들어가면 다시 스페인어로 주문한다. 한국어로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연인과 영어로 사랑을 속삭인다. 매일 반복하는 일상이 이렇다. 난 늘상 그 안에서 새로움을 발견한다. 매일 똑같이 수행하는 언어 학습이지만 어떤 언어를 쓰냐에 상관없이 수행의 감각은 매번 다르다.

언어 학습은 내게 자아를 찾는 일이다. 언어는 나와 자신을 연결하고, 나와 타인을 연결하고, 결국 나와 세상을 연결시키는 매개다. 그리고 지난 주말에는 언어와 친하지 않은 사람을 만났다. 그는 내 말을 듣자마자 언어와 자아가 어떤 연관인지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이 나처럼 샴푸통 뒷면을 꼼꼼히 읽고 모든 간판을 소리내보고 좋아하는 미국드라마를 500번씩 보지 않는다니… 세상 사람이 모두 나와 같지 않다는 걸 깨닫는 기분 좋은 충격이었다. 동시에 어떻게 하면 내가 아는 반복의 미학을 사람들과 나눌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리고 같은 주말, 엘리자베스 와일드의 작업을 만났다.


무제, 엘리자베스 와일드, 2018


비엔나의 예술가 엘리자베스 와일드(Elisabeth Wild)는 나치군의 공격을 피해 돌고 돌아 가족과 남미 대륙 아르헨티나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예술을 공부하고 실천하다 남편과 스위스로 떠나 골동품 콜렉터가 된다. 노후를 딸과 함께 과테말라에서 보낸 와일드는 휠체어에 앉아 매일 잡지를 펼친다. 그리고 매일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A4 용지 크기의 콜라주 작업을 만드는 일이다. 매일 똑같은 루틴을 지킨 와일드는 365개의 서로 다른 콜라주 작업을 자신의 뿌리인 비엔나 현대미술관에 선보인다.


와일드의 작업은 놀랍게도 언어를 대하는 내 마음을 다시 한 번 환기시켰다. 작가가 항상 콜라주 작업을 해온 것은 아니다. 전시는 작가의 초기 작업과 후기 작업, 그리고 참여 공간으로 나뉘었다. 초기에는 현실적인 이미지와 자연 경관을 탐구하던 작가의 관심은 후기의 초현실주의 작업에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매일 반복하는 예술이라는 행위 안에서 보여진 점진적 변화가 내 마음을 움직였다. 얼핏 보면 펜으로 그린 것 같은 손바닥 두 개 크기의 콜라주를 가까이서 보면 선과 면 조각조각을 손으로 오려낸 흔적이 보인다. 결국, 매번 색깔과 형태가 바뀌는 반복은 변화의 주춧돌이 되기하고, 반복 자체가 변화라는 마중물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에 감동받았다.

어떤 하루는 버벅대며 말이 잘 안 나오는 대신 글이 술술 써진다. 또 다른 하루는 외향적인 자아가 튀어나와 스몰토크도 거침없이 하는 반면 차분한 생각 정리는 되지 않는다. 살아있다는 건 움직인다는 것. 비단 몸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의 유동성을 깨달을 때, 난 살아있음을 느낀다. 지루하게 느껴지는 일상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제와 같지 않다.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이들었고 (혹은 젊어졌고), 날씨는 조금 더 덥거나 춥다. 1분 전에 했던 생각은 당장이라도 번복할 수 있다. 변화에 길을 터놓는 삶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 줄지 모른다. 난 그 모험을 기꺼이 떠나고 싶다. 같은 하루는 없다. 반복되는 매일은 생경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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