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평소에 잘 하지 않는 엄마 얘기를 해보고 싶다. 이름만 불러도 마음이 징 울리는 ‘엄마’라는 단어를 언젠가부터 건조하게 바라본 것 같다. 엄마를 성 붙인 이름 석자로 메시지 어플에 저장해놨기 때문일까. 내게 엄마는 어머니로서의 정해진 역할보다 장성희라는 한 인간으로 먼저 다가온다. 성희 씨는 대체할 수 없는 성격과 존재감을 갖고 있고 가정 밖에서 맺는 인간관계가 있으며 매일 수행하는 일과가 있다. 이런 것들이 성희 씨를 성희 씨로 만들고 결국 어떠한 역할 밖 한 인격체로 만든다.
성희 씨는 입체적이다. 분명 따뜻한데 차갑다. 혼자 집을 보던 5살 어린 나에게 장을 보고 돌아오며 인형 옷 세트를 사다주기도 하고 수험생인 내가 불평 불만을 하면 차 키를 던지며 무섭게 화내기도 한다. 지난 여름 한국에 갔을 때 내가 집에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내 꿈에 몇 번씩 나오던 치킨을 미리 시켜놓는가 하면 유학 동안 몸이 불어난 나를 보고 “지금 내가 (네 살에 대해 얘기하기를) 얼마나 참고 있는 줄 아냐”며 나를 옥죄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엄마의 입체적인 면을 모두 이해하고 싶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어서, 언젠가부터는 엄마를 깊이 떠올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때때로 나는 엄마를 생각한다. 그리운 맛, 품, 향 같은 게 있을 때 자동으로 그렇게 되고 만다. 내게 그건 불가항력 같은 일이다.
윤석남은 한국의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라고 불리는 미술가다. 작가가 천착하는 주제는 여성, 동물, 자연 등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두드러지는 것은 ‘어머니’다. 윤석남은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을 절절히 느끼게 하는 작업을 줄곧 선보였다. <어머니의 눈> 연작은 나무 재료 위에 어머니의 모습을 그린다. 어딘가 텁텁하고, 억세고, 거친 모습은 묘하게도 나무라는 소재가 주는 온기, 아늑함, 편안함과 중첩된다. 많은 사람들이 작가의 의도를 격변기 시대의 여성인 어머니의 희생으로 읽는다. 내게 윤석남의 작업은 엄마라는 사람의 불가해함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온전히 이해하고 싶어도 결코 그럴 수 없어서 멀게만 느껴지는, 그럼에도 떠올리면 애틋함에 결국 얼굴을 일그러뜨리게 만드는.
윤석남의 나무는 곧 우리의 존재를 인식하게 만든다. 우리는 모두 엄마라는 나무로부터 나온다. 누군가는 통기타가 되고, 누군가는 종이가 되고 또 누군가는 젓가락이 된다. 형태는 모두 다르지만 내면에 어머니의 존재를 품고 산다. 그건 씻어낼래야 씻어낼 수 없다. 나의 근원. 나의 뿌리. 나의 재료. 우리가 배꼽의 한 단면을 공유하는 이상 엄마와 나는 늘 서로의 일부일 것이다. 좋든 싫든, 곁에 있든 없든 함께 하는 존재. 엄마의 존재는 내 옆에서 날 지켜줄 때도 있지만 불쑥 튀어나와 날 깜짝 놀래키기도 한다. 나 역시 엄마에게 그런 존재일 테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의 초반에는 캐나다 토론토로 이민을 가는 나영과 가족의 모습이 나온다. “디스 이즈 프롬 코리아”라고 한국인의 억양으로 이민청에 서류를 내미는 나영 엄마를 보며 나도 모르게 흘린 눈물은 턱을 타고 목까지 흘러 내렸다. 나는 기러기가족 출신이고 현재는 유학생이다. 해외에 나와 온갖 서류작업을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끙끙대며 해내고 있는 나는 지금의 나와 10살 남짓 차이 나던 내 어린 시절의 엄마를 떠올린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 아이 두 명을 책임지고 떨어진 엄마를. 시공간을 넘어서 우리는 또 한 번 연결됐다. 시간이 쌓이고 흘러야만 보이는 것이 있다. 엄마는 나이테처럼 내 몸에 새겨졌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