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돌이 너의 눈망울에는 힘이 있다. 양쪽 눈 색깔이 달라서 자주 오해받는 강아지야. 얼룩덜룩 털을 휘날리며 혀를 한껏 내밀고 미소짓는 동물아. 내 허락도 없이 내 삶에 침범해서 이제는 너 없는 삶을 상상하면 아리게 만드는 생명. 네가 주는 모든 감정은 네 값이었던 80만원으로 환원할 수 없다. 나와 같은 속도로 뛰는 네 심장은 왜 나보다 두 배 빨리 낡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세상이 원망스럽다. 인간을 보잘것 없게 만드는 생명은 인간보다 빨리 사라진다는 것이. 인간의 사리분별을 흐리는 물건은 인간보다도 오래 지구에 남는다는 사실이. 오돌이 너의 촉촉한 코를 만지면서 난 이런 생각을 한다. 내게 이런 시간을 허락하는 너의 마음씨에 감동하며.
오돌이는 똑똑한 강아지다. 강아지들은 냄새로 시간의 흐름을 알아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유독 칸트같은 배꼽시계를 가졌으며 의사 표현도 확실한 동시에 참을성도 있다. 오돌이가 날 이해하는 것보다 내가 오돌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훨씬 많다는 걸 자주 느낀다. 그럼에도 나는 다른 가족들에게 돌봄을 미루며 이해를 게을리하는 달갑지 않은 반려인일 테다. 오돌이를 만나고 든 확신에 가까운 믿음은 동물과 사람이 반드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1800년대 사실주의 회화 작가로 알려진 로자 보뇌르는 주로 동물을 그린다. 풀썩 앉은 동물부터 힘차게 뛰는 동물까지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처음 보뇌르의 작품을 만난 건 순전한 우연이었다. 스페인 빌바오의 시립미술관에서 돈도 내지 않고 상설 전시를 관람하다 이름모를 동물의 눈이 나를 붙잡았다. 편안하게 누워있나 싶다가도 반짝이는 눈이 애처로워보여 어디를 다쳤나 싶게 만든다. 이 동물은 샤무아. 샤무아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봤다. 이름도 몰랐던 많은 동물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를 누빈다. 그리고 1800년대에는 이렇게 보뇌르의 다정한 시선에 포착됐다.
보뇌르는 그저 동물의 형상만 그림에 담지 않는다. 동물을 둘러산 자연, 동물 안에 있는 감정까지 섬세하게 다룬다. 그의 작품을 볼 때면 새삼 이 우주를 인간 홀로 쓰지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닫는다. 동물과 함께하는 삶의 소중함, 동물이 주는 위안을 고스란히 전해받는다. 보뇌르의 화폭 속 동물과 눈을 마주할 때 종(種)의 경계를 뛰어넘게 된다.
최근에 재밌는 책을 읽었다. 하마노 지히로의 <성스러운 동물성애자>라는 책인데 종을 넘은 사랑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책을 여는 추천의 글부터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인간과 동물 사이 사랑에 즉각적인 거부감이 드는 건 둘 사이 위계를 확실히 하고 싶은 마음 탓이다. 인간은 휴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동물을 이용하고 학살했나. 결국 이 책은 인간이 만든 종의 경계에 의문을 제기하고 인간이란 무엇인지 질문하게 만든다.
보뇌르의 그림 역시 내게 똑같은 질문을 안긴다. 내 눈에 담긴 동물과 내가 마음으로 연결된 것 같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 정도로 사실적이고도 애틋한 그림을 보면 인간과 동물의 위치성을 생각하게 된다. 그림 속 샤무아와 나는 어떻게 다를까. 누워있는 샤무아도, 서서 샤무아를 보는 나도 살아있는 생명인데. 동등한데. 같은데. 존중이 동반되는 종속관계는 괜찮지 않을까 안일한 생각을 하던 날들을 반성하게 된다. 오늘따라 오돌이가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