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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재 Jul 11. 2024

이해와 오해

한국을 떠나기 전, 클럽이라는 공간은 내게 막연한 두려움을 안겨줬다. 제일 큰 두려움은 입장 거부 제도에서 왔다. 난 항상 큰 몸을 갖고 살았다. 한국에 살며 늘 내 몸에 대해 수치심을 갖고 있던 나는 클럽의 문턱에 가는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렸다. 잘 꾸미고 잘 놀 줄 아는 외양을 가져야 한다는 압박은 외부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도록 부추겼다. 게다가 클럽은 자꾸만 내 나이를 의식하게 만들었다. 내가 20대 초반일 때 한국의 클럽들은 그 시기가 지나면 얼씬도 할 수 없을 것처럼 젊은 상태를 유지하도록 방문객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그것도 장애 없고 돈도 있고 매력 자산도 있어서 ‘물을 흐리지 않는’ 젊은이이길. 클럽의 외부에서 내부를 바라보는 시선도 내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아빠가 한 말이 그랬다. 

“클럽 그거 사람들 마약하고 헤롱헤롱하는 데. 그게 내가 생각하는 클럽이야.”


나를 몇 번이고 무너지게 만든 버닝썬 사건을 기점으로 한국에서 클럽의 이미지는 바닥을 뚫고 내려갔다. 돈이 아닌 사람이 화폐가치를 갖는 곳. 그 안에서는 몇 년이 지나도 담담해질 수 없는 트라우마를 안겨주는 범죄가 밥 먹듯이 일어났다. 그 뒤로는 나 역시도 클럽은 이성의 관심에 목말라서 자신의 가치까지 쉽게 내어주는 여자들이나 가는 곳이라고 속으로 심하게 폄하했다. 그 마음을 깊숙이 파보면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내어주는 것들은 무가치할 것이라는 어두운 그늘같은 믿음이 있다. 그래서 바르셀로나에 왔을 때, 클럽에 첫 걸음을 내딛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다. 내 안의 편견과 자기혐오와 마주하느라.


한국 밖으로 나가보니 클럽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 그 대척점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클럽은 쉽게 아웃사이더를 위한 공간이 된다. 들리지 않아도 상관없다. 베이스 소리가 스피커를 찢을 듯이 울리면 진동으로 음악을 느낄 수 있다. 어차피 다른 사람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입모양이나 손짓, 눈빛만으로 충분히 소통할 수 있다. 뭘 입든, 뭘 칠하든, 내 나이, 인종, 몸, 성별 같은 건 그곳에서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곳곳에 마약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현장을 감시하는 믿음직한 가드들이 늘 대기중이었고, 그들을 낙인찍기보다 오히려 사람들은 서로를 챙겨주고 안색을 살폈다. 해외 클럽에서 얻은 것들을 한국에 와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었다. 안전한 공간에서 좋은 음악에 마음껏 춤추는 행위. 그래서 파티를 기획했다. 당시 나는 너무 큰 우울과 슬픔에 빠져있어서 그 파티라도 기획하지 않으면 살아낼 길이 없었다. 한국에 잠시 들어온 나는 친구에게 디제잉을 배우고 공간을 빌리고 친구들의 플레이리스트를 받아가며 열심히 파티를 준비했다. 하루는 피아노를 취미로 배우기 시작한 아빠와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요즘 배우는 디제잉도 양손을 쓰기 참 어렵다는 말을 했다. 그게 폭언의 시작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빠는 숨도 안 쉬고 말했다. 너 설마 지금 디제이가 되려고 그러냐고. 아빠 돈으로 처 먹어서 뒤룩뒤룩 살쪄왔으면 조용히 있다 가라고. 넌 이제 서른이고 재미를 찾을 때가 아니라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을 하며 돈을 벌 때라고. 그 말을 듣자 여태 내가 쌓아온 믿음이 다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해외에서 살면서 내 몸은 한 번도 문제가 된 적 없었고 재미를 찾아다니는 성향은 내 삶을 다채롭게 만들어줬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를 나로 만드는 것들에서 멀어졌고 나를 나답게 만드는 요소는 지워졌다.


우리에겐 유예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제시각에 완벽히 해내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그외의 것은 사치다. 실수나 실패 같은 건 허락되지 않는다. 자주 여성은 죄책감을 배우고 체화한다. 우리는 스스로가 가짜라는 생각을 내재화하며 자란다. 좀 더 친절하고, 정상적이고, 올곧길 기대받는다. 하물며 생리도 좀 더 친환경적으로 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한국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울증 진단을 받은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 기준들을 만족하려고 아등바등하는 모습에서 탈피하고 싶었다. 사람 정신 나가게 만드는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가 선택한 건 춤. 그것도 아주 제멋대로 추는 춤이다. 내게로 향하지도 않은 다른 사람의 시선이 의식된다면, 그땐 눈을 감는다. 음악에 몸을 맡긴다는 건 눈을 감을 때야 비로소 실현된다. 사위가 어두워지면 아무것도 상관없어진다. 다시 눈을 뜨고 춤추는 사람들을 본다. 우리는 다 어딘가 고장나고 어느정도 미쳐있다.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하는 말이 있다. 그동안은 이 말을 볼 때마다 물음표가 띄워졌지만 클럽을 다닐 만큼 다녀봤다고 생각한 지금은 그 말을 조금 알 것 같다.  클럽은 정신이 온전치 않은 이들이 망가진 채로 행동하는 공간이라는 오해는 가장 적나라한 이해. 내가 클럽을 계속 찾는 건 편안하고 안전한 공기를 누리며 스스로를 자유롭게 풀어주기 위해서라는 클럽에 대한 잘한 오해. 이 이해와 오해 간극 사이에서 오늘도 춤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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