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럽 안은 바다같다. 나는 물. 사람으로 파도를 만든다. 같은 움직임은 없다.
어제는 저녁에 무사히 서연이와 목적지에 도착했다. 사방에 물이 정말 많았다. 섬까지 이동도 무사히, 숙소 체크인도 무사히. 그리고 저녁을 못 먹었기에 동네에서 제일 늦게까지 여는 음식집에 가서 인생 최고의 라자냐와 루꼴라를 먹었다. 표정과 애티튜드가 라나 델 레이를 닮은 점원과 아마 중국계로 추정되는 부부가 운영하는 집이었다. 우리는 라자냐를 먹고 감동해 피자를 시키고 프로세코와 벨리니까지 마셨다. 그리고 숙소에 와서 회화 표현을 몇 개 줍기 위해 영화를 좀 봤다.
그러다 서연이가 클럽을 좀 둘러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오기 전에 한 생각인데 왜인지 잊었어서 좋다고 했다. DJ Fart in the Club이라는 재밌는 이름의 디제이를 발견하고 이 사람 웃기다고 했는데 알고보니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여자 디제이였다. 그의 플레이를 유튜브로 틀어놓고 한참을 고민했다. 현재 시각 새벽 세 시. 4시에 도착하면 두 시간 놀 수 있다. 고민을 하다가 신난 맘을 해소하기 위해 숙소에서 불을 끄고 춤을 췄다. 그랬더니 흥이 더 올라서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클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아까 그 식당 부부와 그들의 개를 만나서 인사했다.
비몽사몽 산넘어 물건너 육지를 밟고 클럽에 도착했다. 가는 동안 내 안의 기대를 낮췄다. 확인한 바로는 서른 명 정도가 있을 테고, DJ Fart it in the Club의 플레이 시간도 모르기 때문에 시원하게 허탕 칠 각오를 했다. 아무리 클럽에 가까워져도 인적이 드물어 약간의 허무가 몰려왔는데 곧이어 사람을 발견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DJ Fart in the Club이 현재 틀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줬고 우린 달렸다.
그런데 이게 웬... 코너를 돌자마자 쿨해 보이고 느낌이 참 괜찮은 청년들이 그득그득한 것 아닌가. 앞머리, 옆머리는 짧게, 뒷머리는 목보다 좀 길게 내린 주방가위로 대충 자른 듯한 머리는 이 시간까지 기름 한 방울 안 져 보인다. 둔기같은 두께의 신발 위에 가죽 레그워머를 덧대어 신는다. 머리 위엔 선글라스. 손가락 사이엔 담배. 무엇보다 멋진 시간을 보낸 뒤 보이는 환한 미소. 그들을 마주하자마자 제대로 목적지를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원래대로라면 20유로 이상을 냈어야 하는데 멤버십을 포함해 15유로에 값싸게 들어갔다. 정수기에서 여과된 물도 공짜였다. 바르셀로나에서 6유로짜리 생수만 마시다 공짜물을 마시니 입맛이 돌았다. 그날 나는 내게 주어진 시간 동안 약 30유로어치 물을 마셨다.
예상보다 도착시간이 늦어져 한 시간밖에 놀 수 없었다. 클럽에 들어가자마자 1분 1초도 허비할 수 없다는 비장함으로 무장했다. 특이하게 디제이부스가 무대 정가운데 위치했다. 단차도 없었다. 디제이와 관객 사이 심리적, 물리적 거리가 무척 좁게 느껴졌다. 그래서 더 진심으로 순간을 즐기는 데 열중할 수 있었다. 여기는 즐기러 오는 곳이니 제대로 즐겨주겠다는 마음가짐이었다. 사방에서 쏘아대는 색색깔 조명과 비눗방울이 더운 공기를 채웠다.
DJ Fart in the club은 신처럼 날 조종했다. 나는 정말 아무도 안 보는 것처럼 춤췄다. 적어도 지금까지 클럽에서 논 중에는 가장 그랬다. 땀을 뻘뻘 흘렸다. 누가 내 발을 밟는 팔을 치든 신경쓰이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다른 세상 같았다.
아침이 밝았고 원래 6시에 종료되었어야 할 파티는 거의 7시까지 계속됐다. 그리고 파티가 끝나고 날이 밝은 하늘 아래에서 물과 담배를 번갈아가며 흡입하며 쉼을 누리고 있었다. 마치 뜨끈한 사우나를 마친 것 같았다. 그러다 안드레아라는 아름다운 인간을 만났다. 안드레아는 내가 여태 클럽에서 만난 인간 중 가장 아름다웠다. 안드레아와 나는 번갈아가며 서로에 자리에 쭈뼛거리며 다가가 말을 걸었다. 라이터를 빌리고, 애프터파티에 초대하면서. 악수를 하고, 볼인사를 하면서. 우연 속에서 마주하는 긴장감이 좋다.
안드레아 옆에 있던 가브리엘이라는 애가 다른 섬에 파티가 있대서 연락처를 받았다. 가브리엘한테 이 파티는 내가 경험한 파티 중 최고였다 하니, 존중하지만 본인에게는 아니었다는 시원찮은 반응이었다. 섬으로 가는 길은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오솔길 하나 나있는 풀숲을 휴대폰 라이트를 켜 비춰가며 도달한 곳은 뜰이었다. 한 쪽에는 소파, 한 쪽에는 음료매대, 그 옆에는 디제이부스, 그리고 그 안을 메운 사람들. 여기저기 알록달록한 조명이 대충 걸쳐져있다. 해는 이미 져서 불빛이 있는 곳 근처가 아니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모기가 내 피를 서로 먼저 먹겠다고 난리다. 물론 곳곳에 모기향도 있다.
아침에 이미 힘을 잔뜩 뺀 우리는 슬렁슬렁 앉아있다가 (역시 공짜였던) 물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흐느적댔다. 안드레아는 없었다. 용기를 내 가브리엘에게 안드레아의 행방을 묻자 본인은 아는 안드레아가 많으며 오전 파티에서 본 안드레아는 누군지 기억이 안 난댄다. 준호 정도의 이름이려나. 사건이 종결되니 조급하고 떨리던 마음이 오히려 차분하고 나른해졌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오전 파티부터 내내 안드레아를 신경쓰고 있었음을 의식한다.
다시 눈을 감는다. 가사 없는 음악을 따라간다. 음, 바람, 걸음, 휘적임, 몸을 스치는 옷과 휘파람 소리만 남는다. 결국 나와 남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 외부로 향한 시선을 거둔다. 혼자서도 여럿의 춤을 춘다. 그러다보면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어진다. 누군가를 욕망했다는 죄책감, 타인과 나눈 긴장감, 잊혀진다는 불안감 모두 지금 춤을 추는 내게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어떤 춤을 추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나는 중요하지 않다.
모든 걱정을 잊을 만큼 음악과 몸짓에 집중했을 때 우리는 ‘아무도 되지 않을’ 특권을 누리게 된다. 우리는 중요한 누군가 되기 위해 자주 너무 애쓴다. 그래서 우리가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아차리는 순간은 소중하다. 원망도 질투도 없이 현재에 머물기. 노랫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