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춤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짝을 맞춰 게임을 하고 참여자 중 스파이를 찾아내는 예능프로그램 <X맨>이 유행이었다. 짝을 맞추기 위해 진행하는 댄스신고식을 제일 기대하며 시청했다. 그리고 방송이 끝나면 댄스신고식에 나온 노래를 찾아 다운로드 받아, 방 문을 닫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MP3 플레이어에서 재생되는 브리트니 스피어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핑크 같은 디바들의 노래에 맞춰 섹시댄스를 췄다. 어른이 다 돼서 쓰긴 좀 부끄러운 면이 있지만 어쨌든 난 항상 춤에 진심이었다.
중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케이팝 커버댄스에 열심이었다. 섹시댄스로 다진 실력 때문이었을진 몰라도 나는 아이돌들의 몸짓을 몇 번만 봐도 금방 따라할 수 있었다. 그래서 2년에 한 번 꼴로 진행되는 학교 축제에 나가기 위해 반 친구들에게 춤을 가르쳐주는 건 내 몫이었다. 한 세대를 여럿이서 추억하고, 이상적인 움직임을 다같이 모방하는 일은 여전히 내게 벅찬 기억이다. 아침부터 해가 지도록 연습하고 밤이 되어서 발소리만으로 우리의 움직임이 일치함을 알아채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편으로 케이팝 커버댄스는 완벽성에 대한 강박을 키우는 일이다. 주어진 동작을 군더더기 없이 해내야 하는 건 물론, 곡의 컨셉에 맞춰 의상을 준비하고 대형을 맞추고 하물며 표정까지 연습해야 하는 작업이다. 게다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안무, 화려해지는 의상, 복잡해지는 팬문화를 먼발치에서 보던 나는 지쳐 나가 떨어졌다. 빠르게 생산되고 소멸되는 팝업스토어 같은, 계절메뉴 같은 케이팝 산업은 내게 숨 가쁜 조급함을 안겨줬다. 나는 케이팝을 사랑하면서도 어느 순간부터 케이팝에 염증을 느꼈다. 케이팝과 나는 건강치 못한 관계를 맺게 됐다. 음악방송은 춤추는 몸, 기능하는 몸도 결국엔 보여지는 몸, 전시되는 몸에 잡아먹힌다는 메시지 같았다. 갈수록 빨라지는 세대교체는 거기에 발맞추지 않으면 뒤쳐진다는 경고 같았다. 이젠 아이돌이 추는 각본 없는 움직임을 보고싶다.
클럽을 몇 번 다닌 뒤에도 여전히 댄스플로어는 어색했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춤을 춰야 하는지, 어떤 춤을 어떻게 춰야 할지 몰랐고 계속 사람들 눈을 의식하기 바빴다. 그러다 정말 정신을 놓고 춤을 추는 이를 보면 부러움에 한참을 흘끔거리곤 했다. 아무 눈치도 안 보고 저렇게 움직일 수 있다니. 어떻게?
모두에게 아마 있을 것이다. 그건 바로 어린 자아. 그 아이의 특성도 여러가지다. 나의 어린 자아는 버림 받는 걸 두려워 하고 소외감, 수치심에 취약하며 무조건적인 사랑을 갈구한다. 성인 자아의 친구, 연인, 가족 관계에서 모두 다르고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날 밤 단짝 없이도 단짝의 친구들과 어울린 것은 친구 관계 속에 놓인 그 어린 자아가 어느정도 두려움을 극복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나는 나조차도 관심두지 않은 사이에 성장해있었다.
그날 밤, 나는 사람구경이 무척 고팠고 잘 모르는 사람들과 얕게 연결되고 싶었다. 데이팅보다는 산뜻하고 우연이라는 아름다움을 갖춘 조건으로. 그러니까 클러빙이 최적이었다.
술집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다 친구들이 잘 아는 술집겸 클럽으로 향한다. 신참 가드 때문에 몇 번이나 입장을 반려당했지만 포기하고 돌아가는 길에 매니저를 만나 운 좋게 들어갔다. 샷을 한 잔씩 목구멍에 때려붓지만 난 이걸로 취하지 않는다. 우리는 스테이지 뒤에 짐을 놓는다.
친구 한 명이 물었다.
“이런 장르 좋아해?”
난 입술을 쭉 내밀고 한 손으로 저울질을 하며 그럭저럭이라는 티를 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예전에 이런 말을 들었어. 음악을 규정하려 하지 말라고. 한 음에서 다른 음으로 넘어가는 순간을 타라고. 그 이후로는 모든 음악이 좋게 들려. “
순간, 잠깐, 잠시에 머물라는 그의 말이 낭만적으로 들렸다. 그리고 나도 내 상태를 규정하지 않고 이 마음에서 저 마음으로 넘어가는 순간 순간에 머물고 싶어졌다.
친구의 말을 음미하는데 어둠 속에서 다른 친구가 말을 건다.
“희재, 나랑 손 잡아.”
그는 내가 용기를 낼 때까지 내 시간을 존중한다. 맞잡은 손 위로 내게 말한다. 시끄러운 전자음악 안에서도 그 음성만은 명확히 내 귀에 닿는다.
“희재, 춤을 춰. 나쁜 감정은 비트랑 함께 보내버려. 나쁜 감정을 팔에 실어. 그리고 팔을 튕겨내.”
전시되는 몸, 기능하는 몸, 그 이상의 몸. 그날 나는 ‘그 이상의 몸’을 경험했다. 독소가 빠지고 상처가 치유되고 결국엔 재미를 느끼는 몸. 내 몸이 어떻게 비춰지는지, 잘 작동하는지도 상관없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감각한 이상 춤은 어떤 의식이 되었다. 나를 정화하고 다시 살게 만드는 몸짓으로 간밤에 720칼로리를 태웠다.
김소민 작가의 책 <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지독하게 사회적인 존재인 인간은 연결 속에서만 안전함을 느낀다. 그 연결은 타인의 몸짓에 조응하며 몸으로 느껴야 한다. 내 몸 자체가 연결의 증거물이다. 린 마굴리스가 쓴 <공생자 행성>에 따르면, 우리는 세균으로부터 왔다. 영양분을 에너지로 바꿔주는 우리 몸속의 미토콘드리아는 내 DNA가 아니라 세균과 닮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디서 왔든, 뭘 보고 듣고 자랐든, 결코 완벽성에 도달할 수 없는 우리 몸이 연결의 매개고 회복의 단서다. 나는 ‘칼군무’의 짜릿함보다 ‘막춤’의 아름다움을 공유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