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중견 클러버가 된 나는 한겨울 코펜하겐으로 향했다. 북유럽의 밤은 남유럽의 밤만큼 뜨거울지 궁금했다. 여행 시작도 전에 북유럽에 대한 환상인지 편견인지 모를 선입견이 가득했다. 스포티파이를 만든 북유럽 사람들은 좀 더 세련된 음악을 들을 것 같고 휘게 문화가 있으니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찾아 즐길 줄 알 것 같았다. 어쨌든 서늘한 멋이 있는 곳을 간다는 사실에 기대감은 커졌다.
코펜하겐에 도착하자마자 1년 넘게 경험해보지 못 한 콧속까지 찢어질 것 같은 공기를 들이마셨다. 나도 몰랐는데 내가 그리워하고 있던 감각이었다. 하늘 색은 시멘트 색이랑 똑같았고 사람들은 길쭉길쭉한 다리로 도시를 휘젓고 다녔다. 섣불리 물 한 잔 사먹기 두려운 물가, 웃음기 없이 바삐 갈 길을 가는 사람들, 얼음장같은 바람, 알록달록한 소품들. 내가 상상하던 북유럽의 모든 것 그대로였다.
저녁까지 미술관을 다닌 나는 집에 돌아와 데이팅 어플을 켰다. 굳이 누군가와 화끈한 시간을 나누려던 건 아니었고 혼자 하는 여행이 심심해지면 마찬가지로 할 일 없는 현지인을 만나보는 것도 좋은 경험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한 청년과 테크노 음감회에 가기로 했다. 숙소에서 한참 떨어진 약속장소에 도착했고 급히 잡은 캐쥬얼 데이팅 약속이 으레 그렇듯 역시나 청년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그곳에서 우연히 매즈와 요나탄을 만났다. 대충 귀여워보이는 청년들을 포섭해 말을 걸었는데 음악을 잘 아는 친구들이었다. 걸그룹 뉴진스 음악의 작곡가 중 덴마크인이 있다며 그의 작업을 소개해주고, 한국의 아티스트를 알려달라길래 좋아하는 디제이 예지(Yaeji)를 추천하니 그의 최근 앨범이 명반이라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그들과 한참 담배도 나눠 피고 음악 얘기를 하다가 둘이 떠나 다시 혼자가 되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덩그러니 남겨져 열심히 춤을 췄다. 혼자 간 파티는 처음이라 조금 두려웠지만 이내 아무도 날 신경쓰지 않는다는 걸 알아채고 더욱 격하게 흔들었다.
진작에 예매한 클럽 오픈시간이 다가왔다. 헉 소리가 나는 가격의 택시를 타고 인적드문 곳에 도착했다. 진눈깨비가 내렸다. 이 날씨에 과연 사람이 올지 반신반의하며 도착했는데 눈 위에 사람 발자국이 없다. 허허벌판 위에 이름모를 동물 발자국만 남겨졌다. 불안했다. 다행히 클럽까지 걸어가니 둥둥거리는 음악소리가 들렸고 가드가 보인다.
내부는 촬영 금지. 해외 클럽의 좋은 점이다. 난 학창시절에도 주변에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사람이 있으면 선생님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온 신경을 그쪽에 빼앗겼다. 공연을 보러가서도 앞사람의 휴대폰 화면 속 가수를 한참 보다 다시 무대로 시선을 돌리기 일쑤였다. 인증샷이니 인생샷이니 남기려고 혈안된 사람들이 주변에 없다는 건 내 피로도를 낮춘다. 후레쉬도 찰칵 소리도 없이 이른 시간의 듬성듬성한 댄스플로어를 즐겼다. 혼자 온 나와 눈인사를 하며 안부를 살피는 가드들의 보호 안에서 열심히 춤추고 쉬다 보니 집에 갈 시간이 다 됐다.
터덜터덜 클럽 나와서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데 옆에 택시가 끼익 멈춰 선다. 기사와 라스무스라는 이름의 손님이 어디까지 가는지 묻고 타라고 해서 약 1분 거리에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 주시려나보다 생각하고 착석했는데 숙녀를 집에 보내드려야 한다며 그 길로 집 근처까지 돈도 안 받고 데려다주셨다. 가는 내내 심심하지 않게 말도 걸어주시고 옆에 보이는 건물은 무슨 건물인지 설명도 해주셨다. 본 적 없는 기사도와 황홀한 친절을 맛보고 무사 귀가했다.
다음날도 낮 일정을 마치고 일찍이 예매한 바이닐 디제잉 파티를 위해 일찍 잠을 청했다. 느지막이 일어나 충전된 몸으로 파티 장소에 도착했다. 그날 밤 나는 니나, 오스카, 톰, 에사, 토니노, 러드, 까뮈 등등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북유럽인에 대한 내 편견과 예상을 깨준 그들은 가진 건 뭐든 나눠주려고 했다. 불도, 자리도, 음료도 나눠주다 하물며 주머니에서 야금야금 꺼내먹던 마법의 버섯까지 내어주려 해서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다. 우리는 둥글둥글 기차놀이도 하고 라틴, 재즈, 디스코에 맞춰 스텝도 밟고 뜨끈한 포옹도 교환한다. 아마 이들을 다시 볼 일은 없겠지. 그러니 우리가 헤어진 이후 멋진 인생을 살라는 말로 안녕 인사를 한 밤이었다.
혼자 가는 클럽의 시작은 머쓱하지만 그 머쓱함을 견디면 놀라운 일들이 벌어진다. 우연은 새로운 인연을 가져다 준다. 우연은 처음 만난 사람이 제공하는 환대를 경험하게 한다. 모두가 즐기러 온 공간에는 기분나쁜 긴장감도, 다른 사람이 날 어떻게 볼지 신경쓰는 피곤함도 없다. 그저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과 안부를 주고 받고, 언제든 다시 떠나게 두면 그만이다. 클럽에서 우린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당연하게도, 혼자일 때 늘 운이 좋을 수는 없다. 운수 없는 클러빙 역시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