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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재 Aug 15. 2024

In security

오늘은 애인과 킹키클럽에 간다. 킹키클럽은 사람들의 다양한 성적 취향, 일명 페티쉬를 안전한 환경에서 탐험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한 파티를 진행하는 클럽을 말한다. 음악과 춤이 함께하는 건 물론. 나는 이전에 킹키클럽에 가본 적 있지만 본격적으로 내 세계를 넓혀보겠다는 다짐, 그리고 사랑하고 믿을 수 있는 파트너와 함께하는 건 처음이었다.

우리는 파티에 가기 위해 꾸미면서부터 잔뜩 신이 났다. 눈두덩이가 두꺼운 나는 간만에 성공적인 스모키를 했기에 기분이 좋았고 무엇보다 재밌었던 건 애인을 꾸며주는 일이었다. 마치 어둠의 옷입히기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평범한 검정 반팔 셔츠를 입고 온 그에게 내 크롭민소매를 선사했다. 락스타처럼 눈 아래까지 검정 아이라이너를 칠해주고 검정 립스틱도 발라줬다. 아무 날도 아닌데 이런 민망스런 옷을 입고 있는 게 웃겨서 열심히 사진을 찍고 놀다보니 클럽에 갈 시간이 다 되었다.


클럽 기준 이른 시간인 새벽 1시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사람이 많았다. 맨날 거기서 거기에 특색없이 진부한 투어리스트와 클럽 고인물의 편안한 착장만 보다가 일명 ‘빡세게’ 꾸민, 혹은 평소 입지 못한 옷으로 자유롭게 꾸민 영혼들을 보니 눈알을 새로 단 것처럼 개안됐다.

열심히 춤도 추고 쉬며 잡담도 나누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톱리스 여성들이 몇몇 보였다. Topless, 웃옷을 걸치지 않고 가슴을 다 내보인다는 뜻이다. 애인이 나의 톱리스를 보고싶다고 한다. 딱히 구미가 당기지 않던 나는 나와 내 가슴의 관계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평균보다 큰 가슴 때문에 들어야 했던 말들, 성희롱, 불편한 자세 같은 것들. 나는 가슴을 부끄럽게 여기는 법을 배우며 자랐고 가슴은 내게 수치, 두려움이 됐다.


더 쉬고 싶은 나는 조금 고민하다 애인에게 혼자 15분 춤추고 오면 톱리스를 하겠다고 한다. 애인이 잽싸게 댄스플로어로 튀어 간다. 그사이 파블로라는 사람이랑 스몰톡을 나눴다. 그는 대입 시절 희망학과 두 개를 말해보라며 상대의 성향을 알아보는 섬세하고 기발한 사람이었다. 금세 그에게 마음을 연 나는 톱리스 안건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파블로 덕에 나는 잠깐이나마 나와 내 가슴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애인이 돌아왔고 나는 둘과 얘기하다 다짐을 끝내고 두 가슴을 양 손에 쥐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얘기했다.

“얘들아, 준비 됐지?”

주섬주섬 가슴 리본을 풀었다.


내 가슴을 본 애인과 파블로는 멋지다고 한 것도 같다. 그때는 내가 방금 한 행동이 짜릿할 만큼 자유롭고 어떠한 배덕감까지 느껴져 머리가 울리고 혼란스러운 탓에 주변 상황을 잘 인지하지 못했다. 어쨌든 이 감각은 스케일 위로 따지자면 긍정에 가깝다. 익숙한 기분.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분. 그건 바로 긴 생머리를 박박 밀어 투블럭을 했을 때의 기분이었다. 얼굴에 몇 겹씩 올리던 화장품을 쓰레기통에 버렸을 때의 기분이었고 처음으로 생리컵을 소독하며 한 주를 마무리했을 때의 기분이었다. 두렵지만 반드시 해봐야만 이해할 수 있는 기분. 내게 수치를 줬던 게 더이상 날 옥죌 수 없을 때의 기분이다. 가슴을 다 내놓고 그것들이 이리저리 흔들리게 내버려두며 춤 췄다.


애인은 이런 파티가 왜 좋은지도 물어봤다. 나라는 사람을 탐구하고, 재발견하고, 나신으로 얼굴 붉히긴 힘드니 모두가 친절하고, 서로에게 취약성을 드러내도 판단 당하지 않는 곳이라서 좋다고 대답했다. 물론 사람들 패션 보는 재미는 덤. 나에겐 이런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안전을 확인하고 완전히 날 놓는 시간. 그렇다고 이성을 잃지는 않는 시간. 그러다보면 나의 약점들은 더이상 약점이 아니게 된다.

춤추는 사람을 보는 건 즐겁다. 애인의 춤은 개성있다. 그는 자기 춤을 부끄러워 했었다는데, 열심히 그리고 멋대로 춤을 추는 그는 빛나기만 한다. 오늘은 그도 나도 각자의 벽을 넘은 하루다. 집에 가는 길에 그가 재밌었다고 한다. 그리고 안에서 익숙치 않은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 기분 뭔지 알지. 그도 나도 서로를 살피기를 잊지 않으면서 이 경험을 잘 소화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 둘다 새로운 세계를 연 시간이었다. 벌거벗은 기분이라는 표현이 이제는 다르게 읽힐 것 같다.

또 한 번 킹키클럽에 다녀온 날이었다. 신나고 찌릿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 다음날 애인이 내게 말한다. “우리 나라 대통령도 킹키클럽 갔대.”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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