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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희재 Jul 04. 2024

빈 상태로 돌아가기

베를린에서의 첫 클럽, 어바웃 블랭크에서 반나절을 보내고 집에 돌아가니 왜인지 눈물이 났다. 지난 날을 보상 받은 기분도, 앞이 안 보이는 미래에 대한 불안도, 현 상태에 대한 감사함도 원인이 아니었다. 그 어떤 것도 명확한 원인이 될 수 없었다. 어바웃 블랭크에서 얻은 깨달음대로 난 눈물이 그저 나오게 뒀다. 내 눈물의 원인과 출처를 분명히 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을 그대로 받아들이려 애쓰며.


베를린은 프라이드 먼스 행사들로 인산인해였다. 우리는 밤에 두 시간 제자리걸음을 하며 줄을 섰다 포기하고 아침에 다시 클럽으로 와 아무도 없는 입구에 다다라서야 가까스로 입장했다. 가드는 미리 언질을 주었다. 여기는 킹키 클럽이고 사람들이 다 벗고 섹스할 거야. 괜찮다면 들어가. 들뜬 마음으로 핸드폰 카메라를 스티커로 가리고 입장했다. 클럽에는 실내와 야외 플로어가 모두 있었다. 안은 테크노, 밖은 하우스. 실오라기 한 올만 걸친 사람들로 북적북적. 전날부터 밤을 지샌 사람들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었고 도착하자마자 누군가 나에게 담배를 빌렸다. 화장실은 약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어디서도 싸움, 칼부림 같은 불미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바웃 블랭크에서의 시간은 신기했다. 천국이 있다면 여기일까. 끊임없이 음악이 나오고 사람들은 멋대로 음악에 몸을 맡기고. 술과 담배를 나눠 갖고 맛있는 음식이 가득한 곳. 어디든 널부러져 있어도 안부만을 물을 뿐 위협을 가하지 않는 곳. 머리털 나고 처음 경험하는 자유로움에 어지러웠다. 그래서 천국이 곧 지옥이 됐다. 여기서 이렇게 행복만을 느껴도 되는지, 다음에 닥칠 불행에 대비해 이 행복을 양껏 즐겨야 하는지 헷갈렸다. 처음 만난 이들의 돌봄에 대한 감사를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전에는 이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나면 다음 불행이 닥칠 것을 알기에 불안했는데 이번에는 이런 사랑을 다 받고도 결국 내 뜻으로 죽으면 어떡해야 하나 우울했다. 그 와중에 노래는 좋고 술은 달고 담배는 고소하고. 어바웃 블랭크는 천국이자 지옥이었다.


안에서 같이 간 친구의 친구를 만났다. 그의 담배를 얻어피며 말했다. 내일은 내 생일이야. 그랬더니 그가 답한다. 독일에서는 미리 생일을 축하하면 복이 나간다고 생각해. 그러니 생일 축하는 하지 않을게. 대신 그는 온기 가득한 포옹을 줬다. 난 그걸로 충분했다. 그가 어바웃 블랭크에서의 시간은 어떻냐고 물었다. 머릿속은 여기가 천국인지 지옥인지 판단하느라 터져버릴 것 같았지만 마음은 한 곳으로 향했던 것 같다.

“Heaven on earth. (지상낙원.)”

또 다른 사람을 만났다. 첫만남이었지만 익숙했다. 나는 첫눈에 그를 알아봤다. 오랫동안 내 아픔을 나눠주고 치유해준 사람. 그를 독일에서, 베를린에서, 어바웃 블랭크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는 내가 들어본 적 없지만 오랫동안 기다렸던 질문들을 던졌다. 그와 이야기를 하다 고이는 눈물을 애써 참았다. 우린 깊은 포옹을 나눴다. 적절한 포옹의 시간이라고 생각한 3초가 지난 줄 알았는데 그것보다 오래 그는 나를 안아주었고 나는 입으로 쪽 하는 소리를 내었다.


어바웃 블랭크. 빈 상태로 돌아갔다. 글쓰기 수업을 듣기 위해 베를린에 간 나는 그곳에서의 경험을, 나도 다른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름답고, 무섭고, 짜릿하고, 감동있는, 그래서 부러움과 질투심에 스트레스까지 받을 글로 풀어낼 수 있을까 걱정하고 분노했다. 그런 감정은 다 사라졌다. 아무것도 상관없었다. 내 말을 누가 들어주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클럽에서 만난 한 친구는 내가 굉장한 포옹을 할 줄 안다며 감탄했다. 난 누군가에게 날 증명해보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사랑을 주고 싶은 이들에게 나의 포옹을 나눌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고양된 기분에는 반드시 낙차가 따른다는 걸 어바웃 블랭크에서 보낸 시간을 통해 배웠다. 기분이 원래 상태로 떨어지는 동안 나는 따돌림 받던 어린 자아에 대해 생각한다. 이윽고 나는 어린 자아에 머물지 않는 성인 자아를 떠올린다. 여지껏 함께한 이들의 사랑을 확인하고 나 역시 사랑을 주며 나는 더이상 사랑 받지 못할까 전전긍긍하던 10년, 20년 전의 내가 아님을 상기한다. 그리고 처음 만난 사람과 나누는 다정한 안부, 질문, 관심들이 그렇게 해줬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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