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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Dec 02. 2020

그리웠던 비릿한 바다 내음

'한국인 최초'라는 타이틀이 생기다

경상북도 포항 태생인 나의 유년기는 아무래도 바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나는 훗날 거주하게 될 곳을 떠올릴 때면 바다를 끼고 있는 장소를 염두에 두는 편이다.


수준 높은 도시적 문화생활의 즐거움은 남들보다 조금 덜했을지 모르지만, 매일 산과 들과 흙과 그리고 바다와 함께 뒹구며 그렇게 자연친화적인 환경 속에서 성장해왔다. 그래서인지 매 주말마다 보게 되는 푸른 바다는 나에게 그 무엇보다 가까운 가족 같은 존재였다.



어릴 적부터 바다를 좋아했던 게 이유였던 걸까, 어쩌다 크루즈에 단단히 매료된 나는 그 길로 곧장 5대양 6대주를 누비는 크루즈승무원이라는 꿈을 일사천리로 키워나갔다. 아시아 태평양 중심의 바다 내음이 익숙해져 갈 무렵 나는 더 큰 세상을 만나고자 귀국하였고, 의도치 않게 육지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져갈수록 바다 내음을 지독하게 갈망하기 시작했다.






기나긴 기다림 끝에 나는 프리미엄 크루즈의 선두주자인 홀랜드 아메리카 라인의 6만 톤급 선박인 볼렌담호와 첫 계약을 진행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제주에서 승선해 일본, 그리고 베링해를 거쳐 알래스카까지 도달하는 일정이었다.


분명 이번이 처음은 아닌데 이상하게도 첫 승선할 때와 비슷한 떨림이 전해져 왔다. 합격 이후 회사로부터 받은 비행기 티켓과 LOE*, 공항과 항구 그리고 승선하는 순간까지 나를 거쳐간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 한 번도 본 적 없던 선박의 외형, 새로운 유니폼과 근무환경 등 나를 놀라게 하는 요소들이 곳곳에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LOE(Letter Of Employment): 선사에서 발행하는 고용계약서



부푼 기대를 한 아름 안고 도착한 그곳은 한동안 기억 속에서 아른거렸던 바로 그 장소였다. 세계 각국에서 온 승객과 승무원들로 넘실거리는 화려한 선상 내부가 내 두 눈을 휘둥그레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스타 크루즈에서 보았던 여러 개의 카지노 업장과 수십 수백 명에 육박하는 카지노 부서 승무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아기자기한 업장 크기와 열다섯 명 남짓한 단출한 구성원만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겜블을 주목적으로 하는 겐팅 그룹(Genting group)의 스타 크루즈와는 다르게 크루징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국제 선사라는 것이 피부로 와닿는 순간이었다.



뭐, 승선 경험도 있겠다!
금방 적응하겠지?


그런데, 당돌했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버렸다. 예전처럼 이틀에 한 번씩은 울지 않게 됐지만 매일을 다음 날 걱정으로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다국적 출신의 승객들은 물론이거니와 함께 생활하는 승무원들의 수준이 생각보다 높았기 때문이었다. 업무적으로 발생하는 사소한 문제들과 완벽하지 못한 언어 구사능력 때문에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패배와 좌절의 시간 속에서 힘들어했다.



이렇게 수많은 고비에도 아랑곳 않고 버텨낼 수 있었던 이유는 뭐였을까? 꿈에 대한 열정, 그리고 끈기와 같은 영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가족처럼 지냈던 소수의 구성원들이 베풀어준 친절이 크게 작용하였다. 소문이 빠른 선내 특성상 첫 컨트랙이라는 사실이 일파만파 퍼지기 시작하면서 실제로 신기하리만큼 여기저기서 도움의 손길이 뻗쳐왔었고, 덕분에 원활한 선상생활을 할 수 있게되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잖아? 해보는 거야!'






볼렌담호 오픈덱에서 바라본 망망대해

힘들고 지칠 때마다 나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지긋이 응시했다. 깊숙이 바다 내음을 들이마시고 있다 보면 이유모를 힘이 불끈 솟아올랐기 때문이다. 특히 넘실거리는 바다를 넋 놓고 바라볼 때면 사물의 이치나 자연의 순리, 그리고 우주 만물의 원리 등에 대해 공상이 격상되었고 그러다 보면 일순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곤 했다.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나라는 인간은 대자연 앞에서 하염없이 작은 존재라는 것을 자연스레 자각하게 되었다. 그저 한낱 작은 점에 지나치지 않은 것이랴.



새로이 도전하는 길 한가운데서 '잘하고 있는 걸까'와 같은 의문점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지만,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법이니까.


처음에는 몇 백명의 승무원들 가운데 단 한 명의 한국인으로서 뭔가 특별한 존재가 된 것만 같아 굉장히 뿌듯했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홀랜드 아메리카 라인 선사 역사상 최초의 한국인 카지노 딜러라는 타이틀의 무게를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별 수 있나? 이왕 여기까지 온 이상 나는 그 무게를 견디며 한 걸음씩 전진해보기로 했다.



어쩐지 비릿한 바다 내음이 코 끝을 강하게 자극시킨다는 착각이 들었다.

'초심을 잃지 않기만 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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