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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Sep 09. 2020

나는야 애송이 카지노 딜러

스타 크루즈 승선기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 한마디로 여름방학을 맞아 예정된 실습은 시작한 지 이틀 만에 그만두어야 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출국 날짜가 확정되었다는 것과 승선까지 보름이 채 남지 않았다는 소식이었다.


햇살의 빛줄기 강도가 세질수록 태양이 저무는 시간도 조금씩 길어졌다. 이제 얼마 후면 이곳 특유의 여름 냄새와도 작별인사를 나눠야 할 테다. 서둘러 승선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모든 게 마무리될 무렵 나는 옅은 브라운 계열의 머리카락을 새까맣게 물들였다. 검은색 헤어 컬러를 고집하는 스타 크루즈의 선내 규정을 따라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출국 날짜가 다가올수록 두근거림은 날로 더해져만 갔는데, 그런 나를 보며 너는 참 겁도 없다는 부모님의 말씀에 멋쩍은 웃음만 슬쩍 지어 보였다.






승선 전날 호텔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아침 선원수첩과 여권, LOE(Letter of Employment; 고용계약서) 그리고 바리바리 싼 6개월치의 짐을 마저 꾸려 김해공항으로 향했다.


국제선 탑승은 처음인지라 어쩔 줄 몰라 멀뚱멀뚱 대던 나와는 다르게 친구들은 일사천리로 수속을 진행하였다. 그때 느낀 미묘한 감정은 부러움과 동경 사이었던 걸까. 뭐, 아무래도 좋았다.



제주도 수학여행 이후 첫 비행

창문 밖에는 수채화 물감으로 낙서를 해 놓은 듯한 파스텔 톤의 새파란 하늘과 솜털 같이 두둥실 떠 있는 새하얀 구름이 온 사방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더 갔을까, 아득한 시간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쯤 착륙 안내를 알리는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육지에 첫 발을 디딜 때의 짜릿함은 습하디 습한 홍콩 날씨의 불쾌감마저 싸악 씻겨내려 주었다. 포트 에이전트 측에서 제공한 셔틀버스를 타고 우리는 7만 5천 톤 급의 스타 크루즈 버고호가 정박한 곳을 향해 달렸다.



갱웨이 통과하기 전

터미널에 도착한 후 승선 절차에 따라 수속을 진행하고선 갱웨이(Gangway; 승/하선할 수 있는 배의 출입구)가 위치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리 말고도 각기 다른 지역에서 온 중국인 친구 여섯 명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우리는 배치 메이트(batchmate; 동기 동창)라는 이름 하에 갱웨이를 통과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을 함께하는 사이가 되었다.



수화물 검사하는 중인 시큐러티 부서 친구들

시큐러티(security) 부서의 크루가 수화물을 검열하는 동안 나는 데크(deck; 배의 갑판)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며 긴장되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잠시 후 구릿빛 나무로 된 문을 열자 냉기와 함께 알록달록하고 화려한 크루즈의 내부가 내 두 눈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승무원 전용 공간으로 들어오니 그와는 대조적인 노란빛 형광등과 단조로운 벽면이 나를 적잖이 당혹시켰는데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수록 미로 속을 헤매는 듯한 어지러움에 머리가 지끈거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수화물 보관을 위해 앞으로 머물게 될 캐빈을 차례대로 배정받았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조명을 밝히니 형광등이 사뭇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깜깜했던 어둠 속의 공간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 후로는 정신없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는데 승선 첫날 반드시 해야 할 것들을 진행하기 위해 크루 오피스, 메인 런드리, 린넨 등을 오가며 부랴부랴 움직였다. 정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었다.



승선 첫날 크루 오피스에서 받은 것
캐빈 키(cabin key)




'WOW'


선내 중심부인 메인 카지노 업장에 들어서자 감탄사가 절로 솟구쳤던 것은 처음 보는 수십 개의 바카라 테이블도, 시종일관 불빛이 깜빡이는 주사위 테이블도, 커다랗고 번쩍번쩍한 슬롯머신도 아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천장에 위치한 CCTV였다.


까마득히 높은 천장에는 수십 개의 CCTV가 블록마다 촘촘하게 달려있었다. 자세히 보면 자칫 징그러울 수 있는 그것들은 옹기종기 모여있는 바둑알을 연상케 했다. 웅장함, 아니 어찌 보면 살벌하다고도 느낄 수 있는 겐팅 카지노 업장의 위엄을 새삼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선내 곳곳에 위치한 카지노는 업장 저마다의 고유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스타 크루즈가 괜히 겜블링 쉽(gambling ship) 타이틀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는 대목을 알려주었다.



트레이너(=inspector or supervisor; 지도자)는 'Welcome onboard'라는 말과 함께 열한 명 모두를 격렬하게 반겨 주었다. 소소한 대화를 시작으로 그는 우리가 조만간 받게 될 트레이닝과 스타 크루즈 카지노 딜러로서 지켜야 하는 규율이나 규범 같은 것들을 짧게 언급했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요청하라는 따뜻한 말을 건네었다.




첫 출근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선사 로고와 이름이 새겨진 네임 텍(name tag; 명찰)을 만지작거리다 유니폼 조끼 왼편에 꽂았다. 천천히 옷매무새를 다듬은 나는 그루밍을 위해 거울 앞에 서서 한참 동안이나 머리와 사투를 벌였다.


오늘 밤 무슨 일이 일어날까? 예측 불가한 궁금증을 한 아름 안고 조심스레 문을 나섰다.






함께 승선한 한국인 친구들, 그리고 여섯 명의 중국인 친구들과 여러 방면으로 우리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이 곁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상 생활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승선 초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밤마다 베개가 마를 날이 없었다.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 자신이 참으로 원망스럽고 쉽게 회복하지 못하는 어리숙한 내 모습이 한없이 개탄스러웠다.



파도 소리와 숙면하는 일상이 익숙해질 무렵, 빡빡했던 내 일상에도 자그마한 변화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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