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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Jun 03. 2021

끝이 보이더라도 슬퍼않기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와 함께하는 일본 여행

싱가포르에서의 드라이닥을 성공리에 마친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는 베트남, 홍콩, 대만 등을 거쳐 다시 일본으로 무사 귀환했다.


한동안 잉여로운 삶을 보내서 그런지 오랜만에 카지노 업장으로 출근할 생각에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열정을 다해 근무를 하게 되는 원동력은 역시 적절한 휴식인가 보다.






일본어와 영어가 자연스럽게 배분되어 흘러나오는 선내 방송과 일본어와 영어로 번역되어 나오는 선상신문에 일본 크루즈의 시작이 더욱 실감이 났다.


선내에는 다시금 다양한 국적의 승객들로 붐볐고 선내 곳곳의 디스플레이에는 일본 각 지역을 안내하는 스크린이, 뷔페에서는 익숙한 라멘 냄새가 코 끝을 간지럽혔다.



생에 첫 이치란 라멘은 시즈오카에서. 자극적이지 않고 무난해 남녀노소 좋아할 것 같은 맛이었다. 일본인 주방장이 힘찬 고함과 함께 환한 미소로 라멘을 내어준 탓이었을까, 한국에서 먹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


맨다리에 반바지를 입은 젊은 여성, 경량 패딩을 걸친 할아버지, 라이더 재킷 하나만 걸친 학생 등 단시간에 이런 다채로운 의상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일까, 계절의 변화에 쉽게 적응이 되지 않는 나였다.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가 일본 크루징을 할 때면 거의 요코하마를 홈 포트로 두곤 한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일본 크루징을 하며 가장 많이 방문한 지역이기도 하다.


당시 모항(母港)이었던 요코하마는 항구에 머무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따라서 반나절 이상을 머무는 다른 포트들에 비해 메리트가 크지 않아 특별히 기억에 남을만한 추억은 만들지 못했지만, 한 크루즈를 끝내고 새로운 크루즈의 시작에 앞서 여러 다짐을 하게 되는 곳이라 나름 의미가 큰 포트이다.



예전에 팬스타 크루즈를 타고 부산-오사카를 다녀올 때까지만 해도 내가 이렇게 오사카를 많이 오게 될지는 정말 몰랐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은 가보고 싶은 곳도, 가 보아야 할 곳도 참 많았다. 특히 오사카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지명이라 달리 생각하면 지루할 법도 한데 신기하게도 좀처럼 흥미가 식지 않는 곳이었다.


오사카를 기항하면 꼭 가보아야 할 곳의 리스트를 훑어본 나는 늦은 퇴근에도 굴하지 않고 쪽잠을 자고서라도 나오거나, 부득이하게 포트 매닝(=port manaing; 당직)에 걸렸을 때에는 동료들에게 바꾸어 달라고 부탁하여 가능한 많은 곳을 경험해보려고 노력했다. 비행기를 타고 얼마든지 올 수 있는 거리이나 크루즈를 타고 방문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분명 그로써 느끼게 되는 것들도 다르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지루한 선내 음식을 대신해줄 뽀쏭푹신한 타코야키와 오코노미야키를 먹기 위해 무작정 거리를 나서기도, 가이유칸 수족관에서 여러 종류의 물고기들을 감상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벚꽃 시즌, 봄 내음을 만끽하기 위해 다 함께 오사카 성을 방문하기도 했다.



한적하고 고요한 나고야에서는 주로 가만히 앉아 인터넷을 사용하거나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고 오는 일이 빈번했는데, 하루는 평범하게 보내기 싫었던 탓에 근처 지하철역으로 달려가 지하철 이정표를 올려다보고선 무작정 마음에 드는 단어 하나를 선택해 그 역에서 하차하였다. 한창 일본 추리소설 대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즐겨 읽던 때라 일본 소도시의 모습이 너무 궁금했던 나머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리저리 쏘아 다녔던 하루. 혼자 무언갈 하는 재미를 느끼게 된 순간들이라 굉장히 뜻깊었다.


어느 날, 가마고리 시에 정박한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 일본 크루징이 익숙한 크루 멤버들조차도 이 지역은 생소하다고 하는 게 아닌가. 포트에서 벗어난 이후로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작은 도시의 매력을 감상하기 위해 자박자박 걸어 어느 근사한 식당에서 끝내주는 점심을 한 끼 했다.


일본은 크루즈가 정박하는 날을 하나의 큰 행사로 여기며 이 날을 위해 많은 것들을 준비하곤 한다. 마제스틱 프린세스호에서 아부라쓰라는 도시에 방문했을 때도 느꼈던 사실인데,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는 도시이긴 하나 그것들을 커버하기 위해 승객들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의 퀄리티, 그리고 인프라 구축에 힘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점이 놀라웠다.


국적선 하나 없고 정기적으로 크루즈가 접안하지는 않는 우리나라이지만 언젠가를 대비해 각 지자체와 관련 지역 주민들이 함께 힘을 모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번쩍 들던 하루였다.



에메랄드 빛 예쁜 바다와 그들만의 언어, 그리고 동서양의 문화가 공존하는 곳이라 그런지 오키나와는 도쿄와 오사카와는 또 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맛있는 음식과 신나는 분위기 그리고 활기찬 사람들의 모습에 절로 어깨춤을 추게 만드는 곳이다.


오키나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매번 기다려졌던 이유는 마제스틱 프린세스호에서의 추억이 좋게 남아있었기 때문. 오키나와 도시 자체가 크진 않아 마음만 먹으면 하루 만에 많은 곳을 방문할 수 있는데, 이미 여러 번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신기하게도 오키나와를 정박할 때면 기를 쓰고 밖에 나가려고 했었다.





벚꽃이 만개했다


이번 컨트랙에서 싱가포르 드라이닥만큼 재미있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와 못지않게 즐거운 추억을 선사해준 일본 벚꽃 시즌. '벚꽃이 만개했다'라는 말의 뜻을 드디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던 순간들이었다.


벚꽃으로 물든 욧카이치, 토바, 코치, 히메지는 정말 아름다웠다. 물론 우리나라의 벚꽃도 참 예쁘지만 만화나 소설 속에서만 보아왔던 그 장소 한가운데에 둘러싸여 흩날리는 꽃잎을 감상하는 기분이란.



이시노마키, 하코다테, 니가타, 가고시마 등 평소에 접할 기회가 없는 도시들을 기항하게 되는 하루 전날에는 평소보다 텐션이 두 단계 이상 올라가 있곤 했었다. 그 이유는 평범한 사람들은 대부분 시간과 돈을 들여 굳이 이런 작은 도시들을 방문하지는 않는다고 보는데 나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크루즈승무원으로 각 나라의 소도시들을 방문할 때면 '이런 도시도 방문해봤다'라고 느끼게 되는 성취감이 근무를 함에 있어 참으로 큰 원동력이 되는 것 같다.






시부야의 스크램블 사거리 한가운데에서

마제스틱 프린세스호와의 만족스러운 계약을 마치고 휴가를 보내던 중 받게 된 고용계약서를 보고 펑펑 울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껏 아시아에 머물렀기에 이번에는 유럽이나 남미로 가지 않을까 싶었으나 또다시 아시아를 크루즈를 배정받아 무척이나 아득했던 그때. 하지만 다행이도 드라이닥이라는 진귀한 경험은 물론 아이터너리를 확인한 후엔 그 슬픔이 조금씩 무뎌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토록 승선하기 싫었던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 어느새 정이 들대로 들어버려 추억이 가득한 이곳을 떠날 생각에 시원섭섭한 감정이 솟구치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크루즈승무원의 직업 특성상 계약기간이 언제쯤 마무리된다는 것을 사전에 알 수 있는데, 이렇게 끝을 알고 시작하기에 마음의 준비를 할 수는 있으나 그 끝이 다가올수록 마음을 다잡기는 힘들어진다. 특히나 그곳에서의 기억이 행복했을수록.


끝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했던가, 찬란했던 추억 속에 파묻혀 허송세월을 보내기보단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도록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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