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약 5년 전, 카니발에 입사한 나는 럭셔리 크루즈 브랜드인 홀랜드 아메리카 라인의 볼렌담호와 알래스카 크루징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볼렌담호는 캐나다 밴쿠버를 홈 포트(=home port; 모항)로 둔 7일짜리 크루즈를 하고 있었는데, 밴쿠버를 시작으로 '케치칸', '주노', '스카그웨이' 포트를 기항해 다시 밴쿠버로 돌아가는 일정의 크루즈였다.
이전 직장이었던 스타 크루즈에서 매번 아시아 포트만을 기항하다 이직 후 알래스카를 크루징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나는 너무 좋아 그 자리에서 방방 뛰어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첫 컨트랙이 끝나갈 때 즈음엔 아이러니하게도 지나치리만큼 황홀하게 다가왔던 그 포트들이 지겨워지기 시작하는 묘한 기분을 느끼게 되었다. 기대했던 각각의 알래스카 포트만큼 매 크루즈가 시작되는 홈 포트인 캐나다의 밴쿠버 또한 흥미롭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이 역시도 시간이 흐를수록 기대감이 서서히 무뎌져 갔다.
갈수록 감흥이 떨어지는 게 당연지사였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기에 나는 5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매주 같은 일정에 같은 포트만을 기항하는 스케줄을 그저 묵묵히 소화해낼 뿐이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이다음에 어떤 크루즈에 승선하건 밴쿠버는 다시 홈 포트로 두지 않고 싶다는 마음이 강렬하게 남았다. 그래서인지 그 당시의 나는 '이번이 마지막이다!' 하며 누릴 수 있는 건 다 해보자는 결의를 다졌고, 되돌아보니 그 덕분에 후회나 미련이 남지 않도록 주어진 시간을 잘 보냈던 것 같다.
어느 날 카니발에서 네 번째 계약을 기다리던 도중 마이애미 본사 측으로부터 다음 컨트랙으로 '스타 프린세스'호를 배정받았다. 나는 늘 그랬듯 곧바로 구글에서 아이터너리(=itinerary; 일정표)를 확인했다.
대충 훑어보니 미국 시애틀을 홈 포트를 두고 내가 예전에 방문했던 알래스카 포트를 똑같이 기항하는 일정이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하단에 빨간 단풍이 그려진 캐나다 국기가 있었다. 설마 밴쿠버일까 하던 찰나, 국기 옆 'Victoria'라는 글자를 본 순간 뭔지 모를 안도의 한숨과 함께 눈코입이 동시에 확장됐다. 순식간에 처음 느껴보는 낯선설렘이 마구 샘솟아 내 몸을 휘감았다.
그 이유는 바로 지난 컨트랙이었던 볼렌담호에서 알래스카 크루즈 경험이 있던 동료들에게 빅토리아 포트의 밤이 그렇게 아름답다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기 때문!
빅토리아 포트는 항상 2~3척의 크루즈 선박이 정박하는 편이다. 이맘때는 주로 NCL, HAL의 선박과 함께했다.
5개월을 연달아 알래스카 크루징을 한 경험이 있던 나이기에 더 반가웠던 것 같다. 자칫하면 지루할법한 3개월 이상의 알래스카 크루즈 속에서 나를 구해준 포트 빅토리아. 그래서인지 나에게 있어서 빅토리아는 참 소중하고 의미 있는 포트이다.
쇼어리브(=shoreleave; 기항지 관광 시간) 시간도 어찌나 착한지, 출항을 늦게 하는 탓에 밤늦게까지 포트에 머물 수 있는 곳이라 이 포트를 마다하는 크루 멤버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활기와 여유가 공존하는 캐나다 빅토리아
밝고 화사한 빅토리아의 광장도 웅장하고 아름답지만 포트에서 얼마 멀지 않은, 그러나 걸어가기에는 조금 어려운 곳에 영화에 나올 법한 주택단지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한적한 빅토리아의 거리를 찬찬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넋이 나가는 건 시간문제다.
나는 뼛속까지 한국인인지라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들어도 외국에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데, 캐나다의 빅토리아라는 도시를 알고 나서는 나의 오만함에 심히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중에서도 포트 근처의 주택단지들을 버스 창가 너머로 본 이후 이곳에 터전을 꾸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여기가 바로 내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공간이야. 이 동네 너무 예쁘다..'
그나저나 빅토리아는 거리가 이렇게 붐비면 시끄러울 법도 한데 그런 느낌을 거의 받지 않았던 것 같다.
사람들도 여유로워 보이고 거리도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하고 길을 거닐다 보면 시민의식이 돋보이는 것도 느껴질 정도. 마치 싱가폴에 처음 갔던 그때가 떠올랐다. 선진국의 좋은 표본을 두 눈으로 보고 나니 우리나라에서 무심코 행했던 나의 모습들이 스쳐 지나가며 절로 숙연해졌다.
빅토리아의 거리는 개인적으로 해질녘에서 어두워지는 그 순간이 가장 예쁜 것 같다. 마침내 까아만 어둠이 도시를 삼키고 나면 거리엔 형형색색의 조명들이 저마다 환하게 불을 밝힌다. 확실히 알래스카 크루즈를 하며 기항했던 미국의 시애틀과는 180도 다른 느낌이었다.
각기 다른 건물과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조형물과 조명들이 너무 아름다운 곳. 아무데서나 카메라 셔터를 눌러도 내가 서 있는 그곳이 바로 인생 사진을 건질 수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알래스카 투어를 한창 시작하던 초기,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빅토리아를 제대로 느껴보고 싶어 리스트에 명시된 투어를 전부 신청해보았다.
투어 당일 갱웨이 근처에서 대형버스를 타고 가이드, 승객들과 함께 빅토리아 포트를 구경하는 투어를 진행했다. 매번 어느 장소에 내려 한참 걷거나 다른 장소로 이동해야만 했는데 이렇게 교통수단을 타고 도시를 구경하다니 시간, 체력적으로 훨씬 부담이 덜했다.
파스텔톤으로 물든 노을이 참 예쁜 빅토리아. 여기가 노을맛집인가 싶을 정도다. 화려하면서도 은은한 빅토리아만의 야경은 언제 봐도 짜릿하단 말이지.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그림 같은 예쁜 풍경이 펼쳐지니 감탄사를 연발할 수밖에.
나비를 찾아보시오(5점)
어김없이 패신저 투어를 신청해 혼자 밖으로 나와 빅토리아를 듬-뿍 느꼈던 날. 투어에서 제공된 대형버스를 타고 승객들과 함께 꽤 멀리 나갔던 걸로 기억한다. 식물과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꼭 방문하면 좋을 것 같은 빅토리아 나비 가든(Victoria Butterfly Garden).
우리나라와 다른 기후를 가지고 있어서일까, 태어나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식물들이 즐비했다. 곳곳에는 알록달록 고운 빛깔의 꽃들과 그 꽃들로부터 나는 진한 꽃내음, 그리고 파란 새가 얕게 지저귀는 선율에 이내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렇게 혼자 투어를 마친 후 다음 투어를 진행하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다음 목적지는 바로 에덴동산을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꽃과 나무들의 향연을 볼 수 있는 부차드 가든(The Vutchart Gardens). 입구에서 투어를 함께하기로 한 빙고버니 카렌을 만났다. 600만평에 이르는 규모라 아무리 걸어도 걸어도 끝이 나지 않았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던 우리는 어둑어둑해지자 마지막 피날레인 불꽃축제까지 보고서야 포트로 돌아왔다.
매일 기항해도 좋을 것 같은 캐나다의 보석같은 항구도시 빅토리아.
지금껏 크루즈를 타며 전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녀봤지만 이만큼 따스하고 포근한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다. 음식도 맛있고 공기도 좋고 사람들도 친절해 더더욱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지루할 법한 알라스카 크루즈와 또 한 번 사랑에 빠질 수 있게 도와준 빅토리아에게 너무 고마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