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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Sep 30. 2020

동남아시아의 해협을 가르다

스타 크루즈 승무원 선상생활


Bon Voyage!


이는 불어에서 "여행 잘 다녀오세요"라는 뜻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에게 건네는 인사말이다. 크루즈승무원과, 업계 관계자 분들에 한해서 사용되는 어려운 선박 용어일 것 같지만, 실제로 알고 보면 국적을 불문하고 사용하는 일상적인 인사말에 해당하는 용어이다.



Voyage No.0715
Voyage No.0716
..
.
Voagae No.0809
Voagae No.0810
...
..
.


이 숫자들이 의미하는 바는 뭘까? 우선, 이야기하기에 앞서 Voyage라는 선박 용어에 대해 알아보자. 못 들어 봤다고? 괜찮다, 지극히 정상이니 염려 붙들어 메자. 일반인들에게 있어 이는 백번 양보해도 생소한 단어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니 말이다.



어디서 들어 본 적은 있는 거 같은데 뭐랄까 명확한 뜻을 모르겠는 그런 단어.


이렇게 말하면 조금은 공감이 되려나? 그렇다면 그 뒤에 딸린 숫자에 한 번 집중을 해보자. 단어 뒤에 숫자가 따라온다, 그런데 연속적이다? 상식적으로 그 횟수를 세는 것임을 어렵지 않게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넘겨짚으셨다면, 브라보! 정답에 얼추 근접하였다.


'Voyage'는 우리말로 하자면 명사로서는 항해, 그리고 동사로서는 바다를 건너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뒤로 연이어 번호가 달리면 항해 번호(Voyage No.)라는 뜻을 갖게 된다. 항해 번호는 선박회사가 임의로 정한 일련번호로 쉽게 말하면 선박이 운항한 횟수이다. 참고로, 1항차는 모항(母港)에서 목적항을 거쳐 다시 모항으로 회항하는 과정을 일컫는다.







승선 초기의 나는 근무와 숙면 이외의 것들에는 크게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완벽하지 않은 영어 실력에다 해외 경험이 전무했던 나에게 크루바와 기항지 관광은 머나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앨범과 블로그에는 웃고 있는 사진 투성이라 신빙성이 없다고들 하지만 정말로 출근 전 유니폼을 입기만 하면 이상하게도 심박수가 빨라지고 식은땀이 바짝바짝 마르기 일쑤였다.


매번 나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건 웅장한 겐팅 카지노 업장으로부터 오는 중압감이었다. 한동안 나는 근무 시 주어진 업무를 문제없이 수행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오랫동안 사로잡혔었는데, 그 이유는 실수를 할 시 큰 리스크가 따라왔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고 트레이닝과 근무가 익숙해지면서 점차 그 부담이 덜해져 갔지만 여전히 마음속에는 여행보다는 이 우선순위를 차지했다.



캐빈 한쪽 벽면에 붙어있는 항차 스케줄은 내일은 어디로 가는 걸까의 설렘을 안겨주기보단, 그날 일과를 마친 후 '오늘 하루도 이렇게 지나가는구나'며 해당 칸을 수성 사인펜으로 새카맣게 색칠하는 용도에 그치지 않았다.



동트기 전 끝난 근무에 감상할 수 있었던 하롱베이 선상 뷰
들리는 거라곤 고요함 속 파도를 가르는 항해의 소리뿐






일반적으로 크루즈승무원들에게 있어 첫 항해를 하며 느꼈던 감정은 특별한 경험인 만큼 남다른 추억으로 간직된다고 한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나에게는 그러한 기억이 남아있지 않다. 왜냐고 묻는다면? 글쎄.



꿈을 꾸다 잠에서 깰 때의 경험에 비유해보자. 이런 경우 꿈의 모든 내용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특정 사건들만 듬성듬성 인지된다. 가만히 되새겨 보니 나의 승선 생활 초기는 후자에 해당되었던 것 같다.


일을 배우면서 눈물 콧물 진하게 뺐던 기억, 직원 식당 메뉴에 한없이 실망했던 기억, 태풍이 휘몰아치는데도 열두 시간 근무를 해내야 했던 기억,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괴로웠던 기억, 처음으로 육지에 발 디딘 날 눈물 날 만큼 찡했던 행복 등등.


여전히 많은 사건들이 기억 저 편에 남아 있지만 공교롭게도 첫 항해를 하며 느꼈을 무언가, 그 마음의 소리는 지금까지도 좀처럼 들을 수가 없다. 너무 어려서 경험했던 모든 걸 기억해낼 수 없었다고 치부하기엔 뜬금없이 떠오르는 것들로 과부하가 걸리니 말이다.



지금에서야 이야기하는 거지만 크루즈를 전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첫 컨트랙은 의문 투성이 그 자체였다. 왜 그렇게 서툴렀던 걸까? 전부 다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나에게 현실은 매정했고 맞닥뜨리는 일마다 번번이 넘어지기 쉽상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 기나긴 밤이 지나 어서 동이 트길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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