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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Oct 07. 2020

크루즈로 호주 한 바퀴

스타 크루즈 승무원 선상생활

어느 날 중국, 베트남, 홍콩, 대만을 주로 기항하던 스타 크루즈 버고호가 조만간 아시아를 벗어나 새 항로를 항해할 예정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카더라 통신단의 소문인지라 모두들 반신반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 안은 한동안 이 이야기로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Guarantee Letter from AUS Gorverment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스케줄러에게 한 장의 종이를 건네받았다. 흰 종이에 검은 글씨가 빽빽이 수놓아진 그것은 다름 아닌 호주 정부로부터 온 임시상륙허가서였다. 영어 울렁증이 한창 도질 때라 눈살을 찌푸릴 만도 했지만 익숙한 알파벳 철자들 때문이었는지 내 두 눈은 금세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순간, 얼마 전 거주지와 인적사항을 세세하게 조사했던 그날이 퍼뜩 떠올랐고 이내 입가엔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이후로 딜러와 슈퍼바이저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리포팅 타임(reporting time; 근무 시작 전 카지노 핏/테이블 배정 시간) 시간에는 새 항로에 대한 이야기로 DL(delaer lounge; 스타 크루즈 카지노 딜러 휴식공간) 전체가 떠들썩했다.


호주 크루징이 다가올수록 대만, 홍콩, 베트남을 기항할 때면 늦은 출항 혹은 오버나잇(overnight; 한 도시에 정박하여 1박을 하는 경우)이 빈번해졌다. 처음엔 이렇게 여유로워도 될까 싶었지만 말해 뭐해 기꺼이 그 시간을 누리기로 했다. 매일 일과 잠에 쫓기며 눈코 뜰 새 없었던 우린 그럴 자격이 충분했으니.


호주로 향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된 싱가폴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는 낯선 땅 호주에 대한 기대감을 더욱더 증폭시켜주었다.


홍콩
대만 가오슝
대만 타이베이 101
싱가포르 센토사 아일랜드






버고호는 제럴턴을 시작으로 퍼스(프리맨틀), 올버니, 애들레이드, 멜버른, 태즈매니아(버니), 시드니, 브리즈번, 케언스, 다윈을 순차적으로 기항했다.


내가 방문한 도시가 호주의 어디쯤에 위치해 있나 싶어 지도 위를 하나씩 짚어보니 어느새 검지 손가락은 원 모양을 그려내고 있었다. 과장이 아니라 이 정도면 정말 크루즈로 호주 한 바퀴를 돈 셈이었다.


제럴턴, 프리맨틀, 올버니
애들레이드, 멜버른, 버니
시드니
브리즈번, 케언스, 다윈

반만년의 역사임에도 각각의 도시들은 비슷한 듯 저마다 나름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광활한 땅, 넓은 도로, 웅장한 건축물, 한적한 거리, 깨끗한 공기, 대자연의 경이로움, 맛있는 음식, 친절한 사람들, 그러나 비싼 물가. 여러 가지 의미로 감탄사를 연발케 했던 호주였다.



매일 다른 나라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크루즈승무원의 일상은 안타깝게도 내 이야기는 아니었다. 반복되는 동남아시아 포트, 비슷비슷한 풍경과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점차 단조로움을 선사했다. 이 또한 처음이었기에 여전히 감사하는 마음이 더 컸지만 미지의 대륙이 가져다주는 스케일, 그것은 이 모든 걸 가뿐히 뛰어넘었다.


여러 인종의 사람들이 뒤섞여 거니는 길거리에서, 성당이나 대학교로 추정되는 거대한 건물 앞에서, 넓디넓은 한산한 도로 위에서, 끝없이 펼쳐진 초록 빛깔 잔디 위에서, 어디에서나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할 때가 특히 아시아를 벗어난 걸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다윈을 끝으로 호주의 10개 도시를 모두 정복한 버고호는 인도네시아 발리, 태국 파타야를 거쳐 베트남과 중국을 향해 뱃머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발리
태국 파타야






몇 번이고 나를 울렸던 매캐한 담배연기도, 고강도의 근무 스케줄도, 테이블 위에서의 심적 부담감도 호주 크루징을 위해서라면 아무래도 좋았다. 그만큼 많은 기대와 설렘을 안겨주었던 낯선 땅 호주. 단기간에 호주 이곳저곳을 경험할 수 있어 날아갈 듯 행복했던 순간들이 불현듯 스친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기쁨은 스타 크루즈 사상 최초로 아시아를 벗어나 호주를 항해하는 역사적인 순간에 함께했다는 사실.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잊지 못할 추억들까지. 난 정말 행운아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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