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키친’을 아마존에 올린 날의 고백
2주 전, 이 자리에서 썼습니다.
30번 넘게 거절당했고, 무대를 바꾸기로 했다고.
설 연휴에 원고를 마무리하겠다고도 했습니다.
2/15 글(무대를 바꾸겠다고 썼던 기록): https://brunch.co.kr/@jp-etchlife/105
설 연휴,
잠을 줄여가며 원고를 붙잡았습니다.
지난주 금요일
'The Semiconductor Kitchen: Life Recipes from the Chip Fab'이
아마존에 올라갔습니다.
페이퍼백: https://www.amazon.com/dp/B0GQ9G9R89
킨들: https://www.amazon.com/dp/B0GHMQPYYY
그런데 한 가지, 솔직히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이 책, 영어입니다.
브런치에서 늘 한국어로 만나온 여러분께
영어 책 소식을 전하는 게 좀 민망합니다.
반도체는 글로벌 산업이고,
이 이야기를 세계 무대에 한 번 올려보고 싶었습니다.
그게 이유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 고백하자면,
번역은 AI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해외에서 3년 살긴 했지만, 오롯이 영어로 에세이를 쓸 실력은 아닙니다.
다만 무엇을 쓸지, 어떤 마음을 담을지는 온전히 제 것입니다.
도구는 빌렸지만, 레시피는 제가 짰습니다.
‘반도체 키친이 뭔 책이에요?’
16년 차 반도체 엔지니어가 쓴,
반도체 공정을 인생 레시피로 번역한 에세이집입니다.
저자는 공정을 연구하다가 어느 순간 깨달았습니다.
‘이거... 사람 사는 이야기랑 똑같잖아?’
모래에서 시작해 거울처럼 매끄러운 웨이퍼가 되는 과정은
평범한 사람이 서서히 단단해지는 이야기입니다.
실리콘 표면에 산화막이 ‘자라나는’ 일은
누가 씌워준 갑옷이 아니라
스스로 겪으며 만든 보호막에 가깝습니다. (미공개 내용)
에칭 공정.
필요 없는 것을 깎아내야 회로가 드러나는 과정은
인생에서 ‘무엇을 버릴 것인가’에 대한 용기를 닮아 있습니다.
기술 용어를 모르는 사람이 읽을 수 있냐고 묻는다면,
오히려 그런 사람에게 더 잘 읽힐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용어는 비유로 풀어지고,
뒤의 미니 용어집에는 각 단어마다 삶의 문장이 붙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Void(빈 공간) → 겉은 멀쩡해 보여도 안이 비어 있을 수 있다.
Yield(수율) → 실패하지 않는 게 아니라, 더 빨리 회복하는 것.
Vacuum(진공) → 모든 비어 있음이 상실은 아니다. 어떤 침묵은 준비다.
챕터 사이에는 ‘Side Dish’라는 짧은 에세이들이 놓여 있습니다.
여행의 풍경과 가족의 저녁,
엔지니어의 마음이 잠깐 내려앉는 순간들,
그리고 다시 조용히 리셋하는 기록들.
브런치에서 읽어주셨던 글들이 씨앗이 되긴 했지만
그대로 옮긴 건 아닙니다.
미공개 내용과 새로운 사이드 디시도 더 넣었고,
영어라는 그릇에 옮겨 담다 보니 맛도 조금 달라졌습니다.
잘 됐다고 말하기엔 아직 이릅니다.
어떤 반응이 올진 모르겠습니다.
다만 상업적 성공과 별개로,
한 권이 출간되어 세상에 ‘존재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책들이 있다고 믿습니다.
이번 기획도 저는 그 방향에 더 가까웠으면 했습니다.
그리고 ‘반도체 공정을 인생의 언어로 번역한 에세이’라는 장르가
아직 거의 없다는 게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반도체 인문학,
누군가가 먼저 한 번 무대를 옮겨 보고 길을 내야 한다면,
저도 그 역할을 조심스럽게 해보고 싶었습니다.
마지막 챕터의 제목은 ‘불이 꺼지지 않는 주방’입니다.
저는 연구(R&D) 센터를
세상이 아직 만나지 못한 맛을 찾는 조용한 실험 주방이라 부릅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매일 실패의 맛을 삼키면서도
불을 끄지 않습니다.
한 줄로 말하면,
나노미터의 눈으로 인간의 온기를 측정하는 엔지니어가
반도체 공장을 주방에 비유해 쓴 인생 요리책.
그리고 여기 브런치에서 함께해 주신 여러분께.
이 책의 씨앗은 전부 여기서 자랐습니다.
여러분의 라이킷과 댓글이 없었다면
30번째 거절에서 멈췄을지도 모릅니다.
응원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남은 한국어 이야기는 여전히 여기서 계속됩니다.
저는 어디 안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