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키친] 비워야
흐를 수 있습니다

식각(Etch)이 가르쳐 준 ‘뺄셈’의 용기

by JP 정표

우리는 늘 '더하기(+)'에 익숙합니다.


스펙을 더하고, 인맥을 늘리고, 통장 잔고를 채우는 삶.

무언가 계속 쌓아야만 안심이 되는 세상에 살고 있죠.


그런데 15년째 반도체 팹(Fab)에서 요리하는 저는, 반대로 확신하게 됐습니다.

가장 정교한 작품은 ‘더할 때’가 아니라 ‘뺄 때’ 완성된다는 걸요.


조각가가 돌을 ‘만드는’ 게 아니라,

이미 있는 형태를 가리는 부분을 덜어내듯이요.


반도체에도 그런 공정이 있습니다.

불필요한 것을 가차 없이 깎아내고, 본질만 남기는 작업.

제가 가장 오래 해온 식각(Etch)입니다.




1. 불꽃 준비 — 나를 바꾸는 뜨거운 온도 (Plasma)


단단한 습관은, 말로는 잘 안 깎입니다.
누군가의 “힘내”라는 위로만으로는, 오래 붙어 있던 껍질이 잘 안 떨어지죠.


반도체 주방에서는 그 껍질을 벗기기 위해
플라스마(Plasma)라는 특별한 불꽃을 씁니다.


고체도, 액체도, 기체도 아닌 ‘다른 상태’의 에너지.
겉으론 차가워 보이는데, 실제로는 엄청 뜨겁고 예민합니다.


저는 플라스마를 볼 때마다 ‘시련’을 떠올립니다.
사람이 변하려고 할 때 찾아오는 그 불편한 자극들.
하지만 그 온도가 없으면, 우리는 대개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 버리더군요.


변화는 종종
따뜻한 말보다,
나를 흔드는 뜨거운 사건에서 시작됩니다.





2. 조각하기: 남길 것과 버릴 것을 정하는 일 (Etching)


식각은 “잘라내기”가 아니라
남길 것을 먼저 정하고, 나머지를 덜어내는 일입니다.


반도체에선 밑그림(PR)이 덮인 부분은 남기고,
그 밖의 부분은 플라스마로 깔끔하게 제거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과감함’입니다.
아깝다고 조금 남겨두면, 패턴이 서로 엉겨 붙고
결국 전체가 망가질 수 있거든요.


엔지니어들은 이런 성질을
“옆으로 새지 않고 아래로 곧게 파고드는 식각”이라고 말합니다.
(어려운 말로는 이방성(Anisotropic)이라고도 해요.)


삶도 비슷하지 않나요?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놓치기 싫어서
손에 든 걸 하나도 내려놓지 못하면,
정작 중요한 길이 흐릿해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지키고 싶은 가치가 정해졌다면,
그걸 가리는 것들은—
조용히, 하지만 분명하게 덜어내야 합니다.





3. 태도 — ‘쉬운 방법’이 늘 좋은 건 아니라서 (Wet vs. Dry)


더 쉬운 방법도 있습니다.
재료를 용액에 담가 한 번에 녹여 버리는 방식(습식).
빠르고 편하죠.


하지만 정교함이 필요한 순간엔
우리는 더 어렵고 비싼 방법(건식)을 택합니다.
플라스마 불꽃으로 필요한 곳만 정확히 깎아내는 방식이니까요.


명품과 공산품의 차이가 디테일에 있듯,
삶도 결국 디테일이 방향을 결정합니다.


오늘 하루가 유난히 힘들었다면,
그건 당신이 지금 “대충”이 아니라
정교한 쪽을 선택하고 있다는 신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Chef's Note: 깎여 나간 자리에, 길이 열립니다


식각이 끝난 웨이퍼를 보면 속이 다 시원합니다.
불필요한 막이 사라지고,
반듯하고 깊은 길들이 선명하게 뚫려 있거든요.


그리고 그 길로 전기가 흐르고,
정보가 오가며, 세상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역설적이게도
비워야 흐를 수 있습니다.


혹시 요즘,
너무 많은 걸 쥐고 있느라
정작 중요한 것이 흐르지 못하고 있진 않나요?


두려워 말고 조금 덜어내세요.
지금 당신을 흔드는 그 불꽃은
당신을 망치려는 게 아니라,
당신 안의 ‘진짜 형태’를 꺼내기 위해 온 손님일 수 있으니까요.


다음 시간에는
이렇게 비워낸 공간을 한 층 한 층 채워 올리는 ‘증착(Deposition)’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버림 뒤에 찾아오는 채움의 미학.
기대해 주세요.


— 반도체 키친, JP 정표 드림


식각5.png



(Editor's Note: 이 글은, 더 깊은 이야기를 담아 2025년 12월 말에 새롭게 다듬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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