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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뱡인 Aug 12. 2023

나의 구속기 (4)

4. 슬기로운 구치소 생활

아무렇게 처발라진 페인트가 유독 돋보이는 잿빛 시멘트 벽으로 정체 모를 벌레가 기어올라가고 있었다. 평상시라면 재빨리 처리하기 위해 애썼겠지만 저 생물을 처리할 도구와 그의 사후 정리가 불가능한 이 안에서는 그저 내 곁에 오지 말기만 바랄 뿐이었다. 한숨이 저절로 쉬어졌다. 살면서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어쩌다 내가 이곳에 이렇게 앉아있게 된 걸까?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날 이곳으로 호송해 온 경찰 말대로 그냥 나가버렸어야 했을까? 동생을 기다리지 말고 그냥 혼자 뛰쳐나가버렸어야 했나? 하긴, 산책 후 귀가해서, 응 너의 누나는 체포되어 감옥 갔단다 라는 소식을 듣는 것보다는 내가 혼자 뛰쳐나가 동생을 찾아 같이 떠나던지 찾지 못했다 해도 혼자 뛰쳐나가 머리라도 식히고 오는 게 나았다. 그가 911에 신고해 부풀려 떠들어댈 때 차분히 짐을 싸기보다 전화를 빼앗아 제정신이냐 물었어야 했나? 그 경찰들에게 내가 뭐라고 말했으면 날 잡아 가두지 않고 그냥 갔을까? 머그샷을 찍고, 내 지문을 찍고, 난데없이 벌어지는 체포 처리의 그 과정에 황당했던 그 순간, 나는 뭘 물어보고 이해했어야 준비된 마음으로 이를 받아들였을까?


어찌 되었건 이미 벌어진 일이라 하더라도 앞으로가 더 암담했다. charge와 conviction의 차이를 모르던 때이니 무작정 말로만 듣던 “빨간 줄”이 그어진 거라는 생각에 이 빨간 줄이 평생 나를 괴롭힐 주홍글씨가 될 것인지 어떻게 던 이 빨간 줄을 피할 수 있을 것인지 감이 오지 않았고 그 불확실한 앞날이 나를 더 암담하게 만들었다. 곧 풀려날 것이라는 것은 기정사실 같았지만 그렇다 한들, 내가 애정하는 북적이는 곳에서 산책하고 나들이를 한들, 내 곁을 지나는 수많은 타인들 사이에서 나는 그들과 같이 평범한 사람이 아닌 “빨간 줄의 소유자”일 것이라는 생각이 밀려왔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참 철없는 생각 세상 모르는 생각이었지만 그 날 밤엔 내가 북적이는 인파들 속에 있다 한들 그중 나처럼 이렇게 범죄 기록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는 패배감 이제 그리 애쓰며 쫓아온 평범한 삶의 꿈도 멀어진다는 두려움이 뒤섞여 나를 괴롭혔다.


길지 않았던 그 시간을 한 순간 한 순간 되뇌이기를 수십 번, 앞으로의 막막함, 당장 내일 해야 할 출근 걱정에 머리가 복잡하지만 그래도 산 입이라고 배가 고프다. 시계도 빼앗겨 지금 시간도 알 수가 없지만 저녁때가 가까워 온 모양이다. 정기적으로 구치소 내 순찰을 도는 경찰이 저녁이라며 철문에 난 “개구멍”을 열어 그 받침대 위에 하얀 종이봉투와 빨대가 꽂힌 음료컵을 올려두고 갔다. 왠지 모를 자존심에 개구멍 배식은 거부하겠다 다짐했지만, 뭐가 들었는지 궁금한 마음이 어처구니없고, 속절없이 울려대는 내 뱃속은 야속하고, 솔솔 풍겨오는 고소한 기름 냄새는 부아가 치밀게 했다. 음료라도 한입 마시고 싶었지만 내가 쭈그려 앉은 간이침대 왼쪽 덩그러니 놓인 쇠붙이 변기를 보니 차라리 목이 말라 내 몸이 타버린들 저 변기는 정말 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뻘쭘하게 놓인 음식을 개구멍에 한참 두니 다시 순찰을 왔던 경찰이 그대로 수거해 갔다.


순찰을 도는 경찰에게 물어보니 아직 자정도 되지 않았다. 지루함과 허기짐과 암담함에 이보다 더 처참할 순 없겠다는 생각이 들게 할 때쯤 옆 남성방에 새로운 동료가 입소한 모양이었다. 보이진 않아도 시멘트 벽과 쇠붙이들 사이로 쩌렁쩌렁 그의 스페인어 주정이 여과 없이 다 들려왔다. 술 먹고 뭔 짓을 했는지 몰라도 아직 현타가 오려면 멀었나 보다. 알 수 없는 구슬픈 노래를 한껏 뽐내신다. 옆방에 다른 사람이 있는 걸 알면 좀 잦아들까 싶어 헛기침을 해보았다. 아랑곳 않는 그의 열창, 아, 내가 생각한 바닥보다 더한 바닥을 오늘 다 경험하려나 보다는 생각이 들 때쯤, 그는 소변을 보시고 잠시 후 심하게 코를 곤다. 헛웃음이 나왔다. 저런 사람도 있는데 나는 왜 이리 세상이 다 무너진 듯 엉덩이가 아리도록 앉아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나. 나를 더 딱하게 만든 건 대책 없이 떨려오는 나약한 몸뚱이였다. 아무리 실내라지만 이런 시설에 강력 난방은 터무니없는 낭비일 터였다. 자비롭게 구비해 준 초록 모포는 새것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어떻게 세탁을 했는지 알 수 없는 기름 냄새가 진동을 했다. 입고 있던 카디건마저 압수당해 얇디얇은 흰 셔츠와 청바지로 일리노이의 3월 날씨를 버티자니 가련한 내 몸은 오동나무처럼 떨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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