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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민 Jun 10. 2020

6월이 되면 생각나는 타이거즈 ‘천상비애’ 김상진

최강팀 해태 타이거즈의 에이스를 꿈꾸던 청년

해마다 6월 10일이 되면, 6월 민주항쟁을 기억하기 위해 언론을 포함한 미디어에서 날짜를 여러번 언급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1987년에 있었던 민주화의 성지와도 같은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겠지만, 90년대에 야구를 봤던 사람이라면 가슴 한켠에 있는 아픈 기억도 함께 떠오르게 된다.


1999년 6월 11일, 20년도 더 지난 날짜가 되어 버린 그 날, 최강팀의 에이스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어린 투수가 세상을 떠났다. 그 투수의 이름은 김상진, 입단 2년차였던 1997년 한국시리즈에서 최연소 완투승 기록을 세우며 팀의 9번째 우승을 결정지었던 그 투수다.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 지었던 당시 김상진의 모습 (사진=KIA 타이거즈)

김상진이 LG를 상대로 한국시리즈에서 완투승을 거두고 우승을 확정지었던 1997년 당시 해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한국야구의 최강팀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총 16번의 시즌이 진행되는 동안 절반 이상인 9번의 우승을 차지했으니 8개 팀이 다투고 마지막에 해태가 우승하는 스포츠가 야구라는 자조적인 농담을 다른 팀이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80년대의 해태는 선동열, 김성한, 김봉연, 이순철 등 쟁쟁한 타이거즈의 레전드들이 지킨 팀이었다.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하며 해태를 최강팀의 반열에 올리며 90년대를 맞이하게 한다.


그리고 90년대, 이종범, 홍현우, 이대진, 임창용 등과 함께 최강팀 해태의 다음 세대로 최강팀 세대교체의 일원으로 주목 받았던 주역 중 하나가 바로 김상진이었다. 당시로는 흔치 않았던 고졸 신인으로 입단한 김상진은 뛰어난 제구력을 앞세워 해태의 선발 로테이션 한 축을 책임졌다.


아직까지 미완의 대기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경험이 쌓이면 몇 년이고 두 자리 승수를 챙기며 팀을 지탱해줄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77년생인 김상진은 성실하게 몸관리를 했다면 2010년 이후의 KBO리그에서도 충분히 활약했을만한 나이다. 


하지만, 그의 기록은 1998시즌에서 멈춰있다. 98시즌 이후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투병 생활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98시즌에서도 선발투수로 마운드를 지켰던 김상진이었기에 믿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투병생활 잘 이겨내고 마운드로 돌아가겠다는 그의 인터뷰처럼 곧 마운드에서 다시 그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98년 이후 김상진이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이듬해인 1999년 6월 11일 김상진은 결국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고 말았다. 김상진이 떠난 이후 최강팀의 위용을 자랑하도 해태 타이거즈도 변화를 겪었다.


모기업이 IMF 직격탄을 맞으며 휘청거리고 만 것이다. 주축 선수로 자리잡은 팀의 대들보 이종범은 일본 주니치에 이적료를 받고 이적시켰으며, 마운드를 지켰던 임창용은 삼성과의 현금 트레이드를 통해 이적시키고 말았다. 홍현우 역시 FA로 팀을 떠났으며, 이대진은 재활과 수술을 반복하며 1군 무대에 좀처럼 오르지 못했다.


심지어 타이거즈는 KIA 자동차에 인수되면서 9번의 영광을 함께했던 해태라는 이름도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김상진이 완성했던 한국시리즈 우승 기록 역시 2009년 10번째 우승을 달성하기 전까지 10년 넘게 9번에 머물러 있었다.

추억으로 남은 최강팀 해태 타이거즈 (사진=KBO)

그래서 KIA 타이거즈 선수단은 해마다 6월 11일 경기에 출전할 때면 김상진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유니폼에 검은색 리본을 달고 경기에 임한다. 지금이야 기록이 이어지지 않지만, 과거에는 6월 11일 경기에 꽤 오랜 시간동안 연패를 하면서 더 가슴을 아프게 적시기도 했다.


젊은 나이의 세상과 작별한 사람을 보면 마음이 먹먹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비록 해태의 팬도 아니었고, 지금도 타이거즈의 팬이 아니지만, 해마다 날짜를 인지할 수 밖에 없는 6월 10일 되면 6월 11일에 세상을 떠난 김상진이 떠올라 마음이 아프다.


김상진이 떠나며 해태는 KIA로 바뀌었고, 이후 2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가난하지만 근성으로 맞붙던 팀컬러 역시 대기업 현대기아자동차 그룹의 든든한 지원을 받는 부유한 팀으로 바뀌었다. 해태의 향기를 찾아보기는 힘들어졌지만, 여전히 KIA의 코칭스태프로 김상진과 비슷한 시기에 광주 고교 야구 스타로 군림했던 최희섭과 서재응이 팀을 지도하고 있고, 김상진의 해태 입단 동기였던 장성호는 해설위원으로 야구를 중계하고 있다.


6월 11일, 해태팬이라면 잊기 힘든 그 날. 너무나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던 해태의 영원한 소년 에이스, 김상진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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