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정민 Apr 10. 2020

프로야구 저평가 슈퍼스타를 찾아서 – 2

18연패 시련에도 좌절하지 않았던 ‘슈퍼스타 심수창’

코로나 사태로 인해 프로야구를 포함한 국내 스포츠판이 모두 올스톱 됐다. 한창 시즌이 진행중이던 KBL과 V리그는 우승팀 없이 그대로 시즌을 종료했고, 개막을 앞두고 있던 프로야구와 K리그도 기약없는 개막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국내뿐만 아니라, NBA, 메이저리그, EPL과 같은 전 세계적인 스포츠 리그 마저 중단된 상태다. 스포츠가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생활 그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불만을 가질 수는 없지만, 스포츠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지금의 상황이 아쉬운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개막을 기다리며 무료한 일정을 보내고 있는 야구팬들은 구단 자체 청백전을 포함한 관련 컨텐츠를 즐기며 대리만족을 하고 있다. 특히, MBC 스포츠 플러스의 자체 유튜브 제작 프로그램인 ‘스톡킹’은 2020시즌부터 해설을 맡게 된 심수창 해설위원의 뛰어난 입담으로 야구 팬들 사이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유튜브 '스톡킹'을 통해 큰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는 심수창 (출처=Youtube 화면 캡쳐)

심수창은 해당 프로그램에서 선발로 등판해 단 한 명의 아웃카운트도 잡지 못한 채 만루홈런을 허용하고 강판된 경기를 회고하며, 퀵후크(5이닝 이전에 선발투수가 강판 당하는 일을 일컫는 야구 용어)에서 한 단계 진화된 ‘제로퀵’ 경기를 펼쳤다고 이야기해 함께 출연했던 출연진들을 박장대소하게 만들었다. 


또, 개인 최다 연패인 18연패를 경험했던 시기에 힘들었던 감정이나, 밸런스가 흐트러져 제구가 제대로 잡히지 않고 공이 날리는 현상을 그는 “‘닭발’에 걸렸다, 우리는 이걸 ‘닭발 패스트볼’이라고 부른다.”라고 표현하는 등 본인에게는 아픈 추억일 수도 있는 소재를 유쾌한 이야기로 풀어나갔다.


심수창 본인이 항상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는 결코 야구를 잘했던 선수가 아니다. 어쩌면, 글의 주제인 저평가된 슈퍼스타에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선수일 수도 있다.

심수창의 통산 기록 (출처=KBO 은퇴선수 기록실)

실제로 기록만 살펴봐도 심수창은 그냥 평범하게 선수생활을 오래한 것 말고는 내세울 것이 없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유일하게 선발투수로 10승을 달성했던 2006년 시즌 역시도, 리그 전체의 평균자책점이 3.65였을 정도로 투고타저의 흐름이 강한 시즌이었다. 해당 시즌에 10승을 달성한 심수창은 4.38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리그 26위에 올랐다. 당시에 리그에 규정이닝을 소화한 투수가 26명이었다. 즉, 심수창은 커리어하이 시즌에서 마저도 리그 평균자책점 최하위에 오르며, 결코 평균이상의 위력을 보였다고 말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또, 그는 기록에 비해 여러 가지 이슈로 야구 팬들에게 많이 이름을 알린 선수였다. 신인 시절부터 마치 배우를 연상시키는 잘생긴 외모로 인해 남다른 주목을 받았다. 잘생긴 외모와 대학 시절 국가대표 상비군에 뽑힌 경험이 있을 정도로 좋은 투구를 보였기에 그가 데뷔한 팀인 LG에서는 그를 차세대 에이스로 생각하며 많은 기회를 부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기대치에 전혀 부응을 하지 못하고 부진한 투구를 거듭했다. 팀 내에서 기대치도 점점 하락해 더 이상 그를 차세대 에이스로 기대하는 이는 없었다. 


평범한 경우라면 보통 여기에서 커리어가 저물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겠지만, 심수창의 경우는 역시나 특별했다. 바로 18연패의 늪에 빠지며 개인 최다 연패 기록을 세우며 좋지 않은 의미로 주목을 받은 것이다. 당시 심수창의 연패는 컬트적인 인기를 얻으며,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을 패러디해 그의 1승을 전국민이 기원한다는 ‘슈퍼스타 심수창’이라는 패러디가 나오기도 했다.

심수창이 18연패를 기록할 당시에 나왔던 패러디 (출처=인터넷 커뮤니티)

그런데, 그가 18연패를 했다고 해서 KBO리그에서 가장 못 던지는 레벨의 투수라고는 할 수 없다. 사실 그보다 더 못하는 선수는 많았다. 심수창보다 기량이 떨어지는 투수들은 대부분 2군에 머물러 있거나 1군에 올라와도 주로 승패에 관계없는 상황에 등판하기 때문에 패전을 기록할 기회조차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그 역시도 연패 기록을 한창 쌓았던 2009년과 2011년 사이에 선발을 소화할만한 컨디션과 폼이 아니었다. 선발보다는 조금 덜 중요한 상황에 등판하는 추격조나 패전조 역할을 맡았어야 했으나, 당시 LG의 투수진이 완벽하게 붕괴되면서 이닝을 길게 끌고 갈 만한 투수가 마땅하지 않았기에 심수창이 총대를 멘다는 심정으로 선발로 등판해 패전을 떠안은 것이다.


또, 하나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심수창은 굉장한 노력파라는 부분이다. 18연패야 불운하게 승리를 날려버린 경기가 중간 중간에 섞여 있어, 온전하게 그의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운이 따르지 않았다는 부분은 당시에도 많이 언급됐다. 하지만, 그가 대단한 노력파였다는 사실은 그가 은퇴한 지금에도 많은 이들이 의문 부호를 보낼 것이다.


심수창은 잘생긴 외모와 그다지 좋지 못한 성적 등으로 그저 그렇게 커리어를 보낸 줄로 아는 사람들이 많다. 실제로 매우 이상한 통념 중 하나가 운동선수가 얼굴이 잘생기면 뺀질거리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라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많은 이들이 범하고 있다. 심수창 역시 마찬가지로 그 대상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는 노력하지 않는 선수가 아니었다. 오히려 벼랑 끝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던 선수에 가깝다. 2014년 2차 드래프트를 통해 LG와 히어로즈에 이어 3번째 유니폼을 입은 심수창은 선수생활 이미 30대 중반으로 달려가던 시점에서 큰 모험을 선택한다.


바로 기존의 오버핸드 투구 폼과 함께 스리쿼터 투구 폼을 장착해 두 가지의 투구폼으로 공을 던지는 변칙투구를 시도한 것이다. 기존의 심수창은 팔각도가 완전히 위에서 던지는 우완 정통파 투수였다. 여기에 팔각도를 아래로 내려 스리쿼터로 던지는 투구 폼을 추가해 타자들을 상대했다.


두 가지 투구 폼으로 공이 들어오니 타자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헷갈릴 수밖에 없다. 언뜻 생각해봐도 효과적일 듯한 변칙투구지만, 많은 이들이 시도하지 않는 이유는 투수 본인에게도 밸런스를 잡기 상당히 힘들기 때문이다. 투수가 일정한 폼으로 밸런스를 유지하며 제구가 잡힌 공을 던지는 것은 보기에는 쉬워보여도 상당히 예민한 작업이다. 여기에 자신의 폼과 다른 투구 폼을 하나 더 추가한다면, 기존에 던지던 폼마저도 밸런스가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변칙투구는 투수에게 굉장한 도박이다.


신인급 선수도 아니고 이미 30대 중반이었던 심수창은 이러한 도박에 자신의 커리어를 걸었다. 당시 심수창의 나이와 팀 내 입지를 생각하면 매우 큰 결심을 하고 도전한 셈이다. 그는 당시 FA로 영입한 경력의 선수도 아니었고, 나이가 어린 유망주도 아니었다. 삐끗하면 바로 커리어가 종료되는 시점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하기 위해 위험한 도박에 몸을 던진 것이다.


그 결과 2015시즌 초반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팀 투수진을 잠시나마 이끄는 활약을 했다. 비록 잦은 보직 변경으로 결국 컨디션 유지에 실패하며 최종 성적은 좋지 못했지만, 2015시즌 롯데의 가장 뜨거웠던 순간을 꼽으라고 하면 선발로 불운하게 승수를 쌓지 못하던 심수창이 마무리로 전향해 3이닝 세이브를 기록한 순간이 아니었을까. 당시 히어로즈와 롯데의 원정 경기가 펼쳐졌던 목동구장 원정 관중석에서는 롯데 팬들이 심수창을 향해 가장 큰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심수창의 기록은 그다지 재평가될 요소가 없을 정도로 적절한 평가를 받고 있지만, 심수창이 야구를 대했던 자세나 그의 간절함은 분명히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선수 생활을 뒤로하고 해설위원으로 제2의 인생 출발점에 선 심수창 (사진=MBC PLUS)

이제 시즌이 시작되면 심수창이 마이크를 잡고 해설위원의 자격으로 야구 팬들을 만난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는 자신의 커리어를 스스로 낮추며 자조적인 발언을 통해 야구 팬들에게 웃음을 줄 것으로 기대 된다.

심수창은 슈퍼스타라는 말과 거리가 먼 실력의 선수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소속 팀 이외에도 많은 야구 팬들의 사랑을 받은 선수였다. 단순히 얼굴 때문이 아니라 18연패에도 좌절하지 않았고, 커리어 마지막 순간까지도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던 그의 커리어가 우리 삶의 좋은 교보재가 됐기 때문이 아닐까.

작가의 이전글 김주혁의 '세월이 가면', 그리고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