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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민 Apr 14. 2020

앞길이 구만리인 청춘들이여, ‘라이터를 켜라’

20년 이후 묵직하게 다가오는 코미디 영화

작품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대부분의 것들이 그렇겠지만, 영화는 특히나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 그 가치가 달라진다. 누군가에게는 형편없었던 ‘괴작’이 누군가에게는 큰 감명을 안겨주는 ‘인생작’이 되기도 한다.

 

오늘 이야기해 볼 장항준 감독의 2002년 영화 ‘라이터를 켜라’도 누군가에게 특히 취준 등의 스트레스로 앞길이 캄캄한 청춘들에게는 뜻깊은 메시지를 안겨줄 만한 영화가 될 수도 있다. ‘라이터를 켜라’는 이제는 영화 감독 만큼이나 예능에서의 활약으로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장항준 감독의 코미디 영화다. 영화 자체는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국내 코미디 영화의 전형적인 흐름으로 흘러간다. 당시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이 이렇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생각 없이 한참 동안 웃을 수 있는 재미있는 영화.”


하지만, 청년 실업률이 갈수록 치솟는 오늘 날 ‘라이터를 켜라’를 보고 마냥 아무런 생각 없이 웃으며 영화를 보기는 어렵다. 배우 김승우가 분한 영화의 주인공인 봉구는 서른이 넘도록 백수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새벽부터 나가야 할 예비군 훈련에 갈 차비조차 없어 아버지의 지갑을 뒤적거리다 구박을 받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영화 속에서 통칭 ‘어리버리’로 통하는 봉구의 평판은 이렇다. ‘여러 군데 이력서를 넣었지만 면접한번 보라는 곳 없이 군 제대 이후 집에서 놀고만 있는 쫓아다니던 여자한테도 차인 한심한 놈’ 집에서도 구박 덩어리에 주위 평판마저 이러니 봉구는 변변하게 기 한번 못 펴고 살아간다. 동창회에서 학창 시절 본인을 괴롭히던 친구가 라이터로 눈썹을 그을리게 하는 장난을 쳐 봉구는 욱하는 마음에 들이 받으려 했지만, 왠지 모르게 자신이 없어 그만두고 만다. 

봉구에게 은근한 면박을 주는 동창 역할에는 장항준 감독이 직접 분 했다.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단순한 싸움뿐 아니라 봉구는 극 중에서 내내 자신없는 모습을 보인다. 예비군 훈련장에서 만난 조폭 철곤(차승원 분)이 화장실에서 자신의 라이터를 주웠 가져갔지만, 이를 돌려달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조차 힘들어한다.

사실 철곤이 가져간 라이터는 꽤 사연이 있는 라이터다. 예비군 훈련을 갔다가 차비가 없던 봉구가 주머니를 탈탈 털어 나온 300원으로 구멍가게에서 구입한 당시 봉구의 전재산과 다름  없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봉구가 우연히 얻어 탄 택시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해 화장실에서 일을 보다 두고 간 라이터를 이후 같은 칸을 이용한 철곤이 습득한 것이다.


조폭 보스로 보이는 철곤에게 라이터 하나 제대로 달라고 못하는 본인의 처지와 철곤 부하들의 조롱에 봉구는 그대로 뚜껑이 열리고 만다. 누군가에게는 흔한 300원 짜리 일회용 싸구려 라이터지만 봉구에게는 전재산이자 자존심이었던 것. 봉구는 이를 되찾기 위해 부산행 새마을호 기차에 올라 사투를 벌인다.

이 때 그냥 라이터만 줬어도...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본의 아니게 라이터를 가지고 있던(철곤은 화장실에서 우연히 주웠지만, 체면이 구겨질까봐 부하들 앞에서 봉구에게 돌려주지 못하고 모른 척 했다.)철곤은 봉구 덕에 제대로 일이 꼬이고 만다. 그가 부하들을 이끌고 기차에 올랐던 이유는 자신이 직접 부정선거를 도와준 국회의원(박영규 분)에게 받지 못한 수고비를 받기 위해 테러를 감행하고자 했음이었다. 계획대로 국회의원 일행을 납치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계속해서 끈질기게 라이터를 찾으러 오는 봉구 덕에 철곤의 계획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라이터를 찾기 위해 몸을 던졌던 봉구는 철곤에 의해 승객 전체가 볼모로 잡혀 자칫 잘못하면 탈선으로 참사가 일어날 뻔 했던 기차를 구한 국민영웅이 된다. 


이후, 뉴스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고 되찾은 라이터로 담배 한 개피를 피며 쿨하게 퇴장한 봉구였지만, 사건이 세간에 알려졌는지 봉구의 처지는 완전히 바뀌었다. 사건 전 봉구를 ‘어리버리’라고 표현하던 친구들은 사건 이후 동창회에 참석해 봉구의 완전히 뒤바뀐 상황을 언급한다. ‘여러 회사에서 와서 일하라고 난리고, 얼굴 한번만 보겠다는 여자들이 줄을 섰다.’고 극 초반에 봉구를 폄하하던 친구가 직접 친절하게 언급해준다.

싸구려 라이터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테러와 맞선 봉구, 하지만 그 이후 인생이 바뀐다.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봉구는 라이터로 눈썹을 그을리게 만드는 친구에게도 시원하게 복수를 한다. 봉구가 잘나가게 되자 빈정이 상한 친구가 은근 시비를 걸며 손찌겁을 하려하자 박치기 한방으로 기절시켜 버린 것. 나머지 친구들은 뒤바뀐 봉구를 보고 잠깐 놀라더니 이내 봉구에게 잘했다며, 그를 추켜 세워준다. 순식간에 잘나가게 된 봉구는 영화 내내 보이던 의기소침한 표정이 아닌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친구들과 함께 건배를 하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굳이 개봉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 흘러간 옛날 영화인 ‘라이터를 켜라’에 대한 글을 쓴 이유는 극 중 봉구의 자세를 조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어서다. 극 초반에 의기소침하던 봉구와 극 후반에 자신감 넘치던 봉구의 상황은 사실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별다른 경력이 없는 백수인 것도 똑같고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입장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왜 봉구를 대하는 주위 사람들의 태도와 평판이 달라졌을까? 바로 그를 짓누르던 의기소침한 모습이 사라지고 자신감 넘치게 모든 상황을 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봉구에게 자신감을 안겨준 계기는 조폭의 열차 테러로부터 시민들을 구한 영웅담이다.


취업에 실패하고 세상살이에 치인 청춘들 역시 마찬가지다. 극 마지막의 봉구처럼 자신 있는 얼굴로 세상을 대한다면 상황은 또 달라지지 않을까. 뭐, 그 계기가 될 만한 열차 테러로부터 시민을 구한 영웅담은 만들 수 없겠지만, 계기가 없으면 또 어떠랴. 가슴을 펴고 자신 있게 앞으로 나간다면 구만리인 앞길에도 등불이 될만한 라이터를 켤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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