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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민 Apr 29. 2020

성리학의 그 남자, 코트로 돌아오다.

고양 오리온스, 신임 강을준 감독 체제로

“우리는 영웅이 필요없다고 했지! 승리가 우선이라고 했지! 승리 했을 때, 영웅이 나타나!”


스포츠를 좋아하는 이라면 당연히 들어봤을,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 웹 서핑을 하다 우연하게 한번쯤은 들어봤을 명언이다. 이는 KBL 프로농구 강을준 감독이 창원 LG 세이커스 재임 시절 작전타임에서 남겼던 말로, 강을준 감독 특유의 억센 경상도 사투리 억양에 의해 ‘성리학’이라는 언뜻보면 이론이나 철학과 같은 이름으로 남아있는 어록이다.


강을준 감독의 일명 성리학 어록은 다소, 웃기게 들릴 수 있을 법한 억센 사투리와 특유의 코믹한 어투로 인해 유머러스하게 소비되고 있지만, 실제로 팀 스포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팀워크의 중요성을 관통하는 명언이다.


특히, 농구야말로 팀워크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필드 위에 10명 가까이 혹은 그 이상이 뛰는 야구와 축구 같은 다른 팀 스포츠와 달리 농구는 단 5명이 코트 위에서 제한 시간 내에 승부를 가리는 종목이다. 시시각각 흐름이 변화하기 때문에 팀 멤버 중 단 한명이라도 정신을 놓고 시합에 임하거나 팀원간의 호흡이 제대로 맞지 않는다면, 그 팀은 멤버 구성이 아무리 좋더라도 이길 수 없다. 그냥 단순히 살펴봐도 농구는 1명의 비중이 20%인 종목이 아닌가.


실제로, 강을준 감독은 성리학 이외에도 코믹한 억양으로 작전타임에 수많은 어록을 생산해낸 감독이다. 하지만, 그 어록에서는 팀워크를 중시하는 그의 농구철학이 녹아들어 있다.

방송에도 나왔던 그의 주옥같은 어록들 (사진=엠스플뉴스)

“행수(전형수) 지시를 따르란 말야! 개인 플레이 하면 다 빼버릴 거야!!”


강을준 감독은 LG 시절 저런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전형수는 당시 LG의 주전 가드로 뛰고 있었던 선수로, 대학시절 엄청난 득점력으로 전체 2순위 지명을 받은 선수다. 당시 전체 3순위 지명을 받은 선수가 바로 KBL의 레전드 가드인 매직핸드 김승현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전형수의 대학 시절이 얼마나 화려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프로에서는 가지고 있는 재능을 꽃 피우지 못했다. 전형수는 농구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현재는 ‘아 그런 가드가 있었지’라고 떠올리기도 쉽지 않은 선수다. 하지만, 위 작전 지시에서 알 수 있듯이 강을준 감독은 가드인 전형수에게 전권을 부여했다. 좋은 팀의 경우, 공을 가지고 플레이 하는 온 볼 플레이어와 그렇지 않은 오프 볼 플레이어의 구분이 명확하다. 팀 구성원 중 2명 이상이 서로 공을 가지고 플레이 하려는 성향이 짙어 갈등하게 된다면 팀은 높은 확률로 와해된다.


강을준 감독의 재임 시절 LG는 그다지 훌륭한 가드가 없었다. 앞서 언급한 전형수나 김현중, 변현수 모두 확실한 A급 가드라고 부르기 힘든 수준이었다. 현재 창원LG의 가드를 맡고 있는 김시래 정도의 가드는 당연히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을준 감독은 외국인 선수나 스코어러 문태영 등의 선수가 가드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개인 플레이를 일삼을 때 항상 ‘할렘 농구’를 집어치우라며 일갈했다. 아마도 팀워크와 볼 배분을 중시하는 그의 농구 성향을 볼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가드에게 무조건적인 전권을 부여한 것은 아니었다. 이 명언을 또 살펴보자.


“왜 자꾸 ‘완빵’을 노리냐고! ‘완빵’을 노리니까 에러가 많이 나오잖아! 안그러면 패턴 부르라고! 정신 좀 들었어 이제? 바꿔줘? 냉정하게 해야 돼. 볼 하나 소중하게 느끼고.”


강을준 감독은 가드가 게임 조율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시간만 잡아먹다가 폭탄 던지기하듯 공격을 처리하면 항상 저렇게 작전타임을 불러 일갈했다. 물론, 정해진 패턴이 있는데, 이를 활용하지 않고, 네 마음대로 플레이하면 빼버리겠다는 엄포도 잊지 않았다.


물론, 오리온스가 강을준 감독을 선임한 것은 매우 의외의 결과다. 지난 시즌 도중 우승을 일궈냈던 추일승 감독이 자진해서 사퇴를 했고, 팀 프랜차이즈 출신의 김병철 코치가 감독 대행을 맡았다. 많은 이들이 선수와 코치로 오리온스의 우승을 경험한 김병철 코치가 대행이 아닌 정식 감독에 오를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소 의외의 선임이 이어지자 강을준 감독을 향한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그의 농구는 그렇게 철학 없이 웃기기만 하는 농구가 아니다. 다들 간과한 부분은, 심판 판정에 가장 신사적으로 항의를 해 손해를 많이 봤고, 외국인 선수의 땀을 직접 닦아주기도 하고, 때로는 상대 팀의 극적인 버저비터가 터져도 웃으며 박수를 쳐주는 KBL에서 가장 매너있는 감독이기도 하다. 심판의 오심과 이로 인해 배치기를 해대며 싸워대는 감독보다는 이런 매너남이 작전타임 동안 어록을 연출해내는 것이 KBL 흥행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LG시절 그를 명장이라 부르긴 어려울지 몰라도 그가 흥미로운 농구를 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사진=KBL)

모두가 강을준 감독의 성리학은 알고 있지만 그 어록이 터진 상황은 정작 잘 모르고 있다. 해당 작전타임은 바로 그의 창원LG 시절 마지막 경기였던 2010-2011시즌 LG와 동부의 6강 플레이오프 3차전이었다. 당시 LG는 2패로 몰린 상황이었고, 강을준 감독은 지난 두 시즌동안 모두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모두 6강에서 맥없이 주저앉은 기억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어진 계약 마지막 해 플레이오프, 2연패로 몰린 상황에서 적지 않은 점수차로 뒤지고 있는 3차전, 누가 봐도 재계약이 힘들어진 절망적인 순간에서 성리학이라는 희대의 명언을 터뜨린 것이다. 생각해보라. 자신의 안위가 달린 큰 시합에서 ‘팀 승리가 우선이지, 영웅이 되려는 욕심 때문에 모든 것을 망치지 마라.’는 교훈을 주고 있는 선장이 과연 흔할까.


어찌 됐든 우리는 성리학의 남자, 강을준을 다시 한번 만나게 된다. 과연 다가올 시즌에는 오리온스의 작전 타임에는 또 얼마나 많은 어록들이 터져 나올까. 벌써부터 겨울 농구 시즌을 기대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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