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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민 May 08. 2020

프로야구 저평가 슈퍼스타를 찾아서 – 3

마이로우가 10년만 늦게 한국 무대에 왔었더라면?

지난 어린이날, 길었던 기다림 끝에 마침내 프로야구가 막을 올렸다. 리그는 시작부터 이변과 명장면을 연이어 연출하며, 야구에 굶주렸던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ESPN을 통해 해외로도 전파를 타며, 메이저리그 개막이 잠정 연기된 시기에 때 아닌 야구 한류 열풍이 부는 것이 주목할 만한 점이다.


야구의 본고장인 미국에서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는 KBO리그, 지금이야 시즌 초반이지만 시즌이 점점 진행될수록 팀 순위에 결국 모든 눈길이 집중된다, 예나 지금이나 리그에서 성적을 내기 위해서는 흔히 용병이라고 부르는 외국인 선수의 활약이 절대적이다. 


98년 프로야구에 처음 도입된 이후, 어느덧 20년이 넘은 외국인 선수 제도는 “용병 농사가 1년 성적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리그 판도를 좌우할 만한 중요한 요소로 점쳐지고 있다. 도입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이방인들이 한국 프로야구 무대를 밟았다. 그 중에서는 최동원, 선동열 못지않은 투구를 보여주며 팀을 정상에 올렸던 선수도 있지만, 코리안 드림을 미쳐 다 이루지 못하고 짐을 싸 시즌 도중에 쓸쓸하게 귀국해야 했던 이들도 있다.


물론, 비율을 따지자면 영광의 커리어를 남긴 선수보다 시즌 도중 퇴출당하거나 재계약에 실패한 외국인 선수가 더 많을 것이다. 또, 그렇게 떠났던 이들은 야구 팬들 기억 속에 희마하게 사라져 간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외국인 선수 중에서도 저평가된 선수는 분명히 있다. 특히, 2006년 롯데에서 뛴 브라이언 마이로우는 시대를 잘못 탄 저평가된 외국인 선수라고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다.


2006년 시즌을 앞두고 당시 롯데는 여러 부분에 변화를 줬다. 사령탑부터 2년간 감독을 지냈던 양상문 감독에서 과거 84년과 92년 우승을 일궈냈던 강병철 감독으로 교체를 했고, 외국인 선수 역시, 기존의 킷 펠로우와 라이온 잭슨을 모두 교체하고 불혹을 넘긴 ‘검은 갈매기’ 펠릭스 호세를 다시 데려왔다. 당시 펠릭스 호세와 짝을 이뤄 중심타선을 책임지기 위해 데려온 선수가 바로 브라이언 마이로우였다.


2006년 롯데에서 뛰었던 마이로우 (사진=롯데 자이언츠)

마이로우는 76년생으로 당시 한국 나이로 31세였다. 65년생으로 42세였던 호세와는 달리 한창 전성기를 구가할 나이의 타자였다. 그는 우투좌타의 내야수로 완전하게 1루수로 자리를 굳힌 이대호의 뒤를 이어 주전 3루수 자리를 맡기기 위해 롯데가 야심차게 영입한 선수였다.


하지만, 스프링 캠프를 치른 결과 3루 수비는 불가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결국 수비에 낙제점을 받고 좌익수로 자리를 옮겨 개막전을 맞이했다. 수비는 비록 낙제점을 받았지만 방망이는 합격점 그 이상의 능력을 보였다. 마이로우는 시즌 초반 4할이 넘는 타율을 기록하며, 각종 타격 지표에서 모두 상위권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14년이 흐른 지금, 2006년의 롯데 타선을 회상한다면 “이대호와 호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정도의 평가를 내리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타율, 홈런, 타점 모두 1위에 오른 이대호와 홈런 2위에 오르며 노익장을 과시한 호세를 제외하면, 변변한 타격 실력을 보여준 타자가 아무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롯데는 홈런 1,2위를 모두 데리고도 형편없는 팀 공격력을 보여주며 7위에 머무르고 말았다.


아니, 그렇다면 시즌 초반 훨훨 날던 마이로우는 어디로 갔을까? 시즌 초반의 기세만 생각하면, 이대호, 호세와 함께 중심타선을 이뤄야하지 않았을까?


아쉽게도 마이로우는 시즌 초반의 기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시즌 한달동안 4할이 넘는 타율은 2할 3푼대로 곤두박질 쳤고 변화구에 약점을 드러내며 삼진 개수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롯데는 타선 강화를 위해 마이로우와 결별하고 훗날 베이징올림픽 미국 국가대표로 출전하기도 하는 존갈을 영입한다.


2006시즌 마이로우의 기록 (사진=한국야구위원회)

당시 마이로우의 기록이다. 외국인 타자가 0.231밖에 치지 못하다니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하지만 당연하지 않다. 마이로우는 변화구에 약점을 보이며 삼진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반대로 볼넷도 꾸준하게 얻어 나가는 선수였다. 타석에서의 생산성을 결코 잃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마이로우의 2006시즌 출루율은 0.396이다. 그냥 봐도 뛰어난 수치로 보이는 이 출루율은 당시 리그 출루율 7위에 올랐던 이택근의 기록과 같다. 시즌 중반에 퇴출됐지만 12개의 홈런을 기록했을 정도로 마이로우는 장타력 역시 충분히 검증된 타자다. 그의 장타율은 0.457과 출루율을 합한 OPS의 값은 0.853이다. 당시 리그 7위 김태균의 OPS가 0.852였고, KBO리그 터줏대감 데이비스의 기록이 0.856이었다.


당시 롯데는 리그 10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생산력을 가진 선수를 공격력 강화를 위해 퇴출했다. 역시 롯데 수뇌부는 야구를 잘 몰라서 이런 판단을 했을까. 답을 하자면 아마 마이로우는 당시 8개 구단 어느 팀 소속이라도 특별한 사유가 있지 않는 한 방출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KBO리그 홈페이지에도 출루율을 확인할 수 없었을 정도였다. 팬들도 세이버 메트리션을 활용한 기록을 보는 지금과 환경이 사뭇 달랐다. 당시 “이 선수의 타율이 2할 3푼으로 낮아 퇴출을 하겠다.”라고 이야기해도 특별히 잘못된 판단이라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만약, 그가 10년 정도 이후 KBO리그에서 뛰었다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새로워진 여러 기록들 앞에 자신의 공격력을 정확하게 평가받으며 더 높은 수준의 재계약을 끌어내며 부산 팬들에게 큰 인기를 얻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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