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 아래에서
벽돌탑의 도깨비 - 40 <절벽 아래에서>
사내는 어제의 과음으로 해가 중천에 뜬 뒤에 겨우 문을 열고 기어 나왔다.
“속은 괜찮은가?”
라는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아직 멍하게 떠진 사내의 눈에 사물이 제대로 맺히지 않았다. 두 손으로 눈을 비벼 쳐다보니 사내의 장모가 밭에 참을 가져다주고 오는 길이었다.
“아이쿠, 장모님 제가 늦잠을 잤네요. 깨우시지 않고…….”라며 사내는 머리를 극적이며 짚신을 발에 끌고 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어제 또래들이랑 밤늦게까지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속은 괜찮은가?”라고 말하며 장모는 부엌으로 슥 들어가 버린다.
“아……. 네, 괜찮습니다.”라는 대답을 우물쭈물하자
“자~.”하며 장모는 사내에게 사발에 물을 담아 건네줬다.
“고맙습니다.” 사내는 쉬지 않고 한 번에 사발에 물을 들이켰다.
“쉬러 왔으니 맘 편히 쉬게.”라고 말하고 장모는 마당을 가로질러 사립문을 나선다. 몇날며칠을 밤마다 사내가 마을 또래들과 어울려 술을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셔도 장모와 장인을 별말을 하지 않았다.
“장모님 집사람은……?”
“밭에 나가있네. 그 애 나가있다고 맘 쓰지 말고 우리 집에 있는 동안은 맘 편히 쉬게. 안동이 좀 조용해지면 가게. 소문에 아직도 관아 인근이 시끄럽다 하더군. 아니면 이참에 이쪽으로 이사 와서 우리랑 같이 사는 것도 어떤가? 유교세상이라 하지만 남들은 옛날처럼 장가들어 처가에서 잘도 같이 사는데 자네는 왜 그렇게 못하는가? 자네도 우리랑 같이 살면 우리 땅에 우리가 농사지으니 아쉬울 것이 뭐 있겠나? 분가야 애들 크고 하면 되는 것이고……. 한번 생각해보게.”
“……”
풍산아재는 다 마신 물 사발을 든 채 장모가 가는 뒷모습을 쳐다만 보고 있다.
처갓집 근처 연못에 앉아 장모한 한 이야기를 생각해봤다.
‘도깨비 때문에 안동은 어수선하고 이곳 풍산은 땅도 많고 하니 여기로 이사를 와서 살까? 그런데 돌이네는 어떻게 되었을까?’
풍산아재는 돌멩이를 들어 연못에 휫 던졌다. 돌멩이가 연못에 떨어지자 둥글게 둥글게 원을 그리며 파장이 번져갔다.
도깨비 일행의 배가 여울목을 조심스럽게 지나 여울을 따라 빠른 속도로 떠내려갔다.
“너희는 여울목을 건너서 배를 쫓도록 하여라."라고 막내가 방금 여울을 빠져나간 도깨비 일행의 배를 보며 일행들에게 명령을 하자 한 무리가 강물로 뛰어들어 여울목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방으로 물을 튀기며 거침없이 강을 건너갔다.
“지도를 봅시다.”
막내의 말에 옆에서 달리던 검은 옷의 사내가 품속에서 지도를 꺼냈다. 몇몇이 지도를 둘러싸고 회의를 하는 사이에도 검은 옷과 흰 옷을 입은 사내들은 계속해서 강을 따라 쉬지 않고 뛰어갔다. 그들은 강가 나무 사이로 도깨비 일행이 탄 배가 멀리 보이는 것을 확인하며 달렸다.
검은 옷의 사내가 펼친 지도에는 굽이굽이 흘러가는 낙동강과 그 구불구불한 강줄기 좌우로 울퉁불퉁하게 솟아 있는 산들이 그려져 있었다.
“배가 첫 번째 여울을 통과했으니 다음 여울이 이곳과 이곳 정도에 있어 보입니다. 저 배 크기로 봤을 때 수심이 낮은 여울인 이곳과 이곳을 쉽게 통과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러니 한조는 여기 보이는 들판을 가로질러가고 나머지 한조는 강가를 따라 계속해서 배를 따라 갑시다. 강을 건넌 조가 반대쪽에서 따라가면 이곳 여울에서 잡을 수 있을 겁니다.”라고 말하며 지도 속 여울목이 있을 듯한 지형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막내가 말을 멈추고 둘레의 사내들을 둘러보자 모두 강한 눈빛으로 명령을 이해했다는 답을 했다.
“자, 그리고 이곳에서 한 번 더 기회가 있습니다. 위쪽은 늪지가 발달해서 우리가 접근하기 힘들지만 이곳 절벽은 강폭이 좁아요. 절벽 위쪽으로 올라가서 활을 쏘며 공격하고 강반대쪽에서도 함께 협공을 하면 잡을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잡으면 여울까지 갈 필요도 없죠. 자 그럼, 각자 위치로 출발합시다.”
막내의 말이 끝나자 사내들은 지도를 말아 품에 넣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들판이 나오자 그들은 두 무리로 나뉘어 강을 따라 달리고 들판을 가로질러 달렸다.
“누나, 저기 절벽 위에 집이 있어요.”라고 말하며 돌이는 손가락으로 절벽 위에 집을 가리켰다.
“저건 낙암정이라는 정자야. 도깨비가 정자 터를 잡아줬다는 전설이 있어.”
“정말요. 혹시 아저씨가?”라며 돌이는 도깨비를 돌아봤다.
“아니. 난, 아니야.”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 근처에 도깨비들이 많이 나온데. 저기 정자에 엄청나게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를 도깨비들이 떨어뜨렸데, 그렇게 해서 생겨난 터에 정자를 지었다고 해.”라고 처녀가 이야기를 하자 돌이는 신기해서 정자 쪽을 진지하게 쳐다봤다. 처녀는 돌이를 흘끗 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물귀신도 유명한 곳이야. 여기서는 물에 빠지면 큰일 나. 물귀신들이 사람 다리를 잡고 아래쪽 깊은 곳으로 당겨 가버린데.”라며 처녀가 놀라서 눈이 똥그래진 돌이를 향해 과장되게 말했다.
“이 근처에 도깨비들이 많긴 많지. 이쪽 도깨비들은 아이 고기를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있지. 크크크크”하며 도깨비가 돌이를 놀리자 처녀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어버린다. 눈이 똥그래져있던 돌이도 이제야 장난이라는 것을 알고 한숨을 쉬며 마음을 달랬다. 도깨비와 처녀의 웃음소리가 수면으로 시원하게 퍼졌다. 고개를 살짝 들고 웃던 처녀의 눈에 검은 옷과 흰 옷의 사내들의 움직임이 들어왔다. 사방을 둘러보니 멀리 있지만 그들이 계속해서 배를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이봐요. 숲속과 들판에서 계속 우릴 따라오고 있는데 절벽 위에도 사람들이 보여요. 이대로 가다가는 잡히겠어요. 다음 여울목은 수심이 얕아서 이배는 바닥이 걸릴 꺼에요. 물이 많을 땐 괜찮지만 지금 정도면 어려울 것 같아요. 어떻게 하죠?”라고 말하며 도깨비를 처녀 뱃사공은 도깨비를 바라봤다. 둘이 방법을 찾으려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도깨비의 등에 화살이 날아들었다. 푹하는 소리와 함께 도깨비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리고 화살 몇 대가 도깨비의 등에 연이어 꽂혔다. 도깨비는 몸을 숙이며 처녀와 돌이를 감싸 안았다. 곧이어 절벽에서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배의 돛을 화살이 뚫고 지나가고 배 갑판에도 화살이 무수히 박혔다. 도깨비가 화살이 날아오는 곳을 확인했다. 절벽위에서 아래로 화살을 쏟아대고 있었다. 도깨비가 방망이를 꺼내 날아오는 화살을 쳐냈다. 그리고
“저쪽 절벽에 배를 댑시다.”라고 말하며 낙암정 아래 절벽을 가르쳤다.
“네? 그런 뒤에는 어떻게 하려구요?”
“나한테 생각이 있으니 일단 배를 저쪽에 붙여요. 절벽 아래로 화살을 쏠 수는 없으니 일단 그곳으로 피합시다.”
도깨비가 빗발치는 화살을 하나하나 쳐내는 사이 처녀 뱃사공은 도깨비의 말을 따라 배를 절벽 아래에 바짝 붙였다. 그러자 화살이 날아오지 않았다.
잠시 조용해지자 도깨비가 절벽에 자신의 귀를 가져가서는 붙였다. 눈을 감고 뭔가를 듣는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나서 절벽에 있는 바위 위에 있는 검은 색 동글동글한 돌멩이를 하나 쥐어들고 벽을 사방으로“탁. 탁. 탁.” 두드렸다. 그러더니 소리가 조금 다른 곳에 가서 절벽에 입술을 대고
“에햄, 에햄, 에햄.”하고 세 번 헛기침을 했다.
잠시 뒤 바위에서 메아리 소리처럼
“에험, 에햄, 에햄.”이라는 소리가 돌아왔다.
“여기가 맞군.”하고 도깨비가 고개를 돌려 처녀 뱃사공을 쳐다보며 씨익 하고 웃었다. 돌이와 처녀는 도깨비가 무엇을 하려는지 몰라 설명을 들으려고 도깨비의 얼굴만 쳐다봤다.
그때 절벽위에서 노란 꽃잎 같은 것이 수없이 강으로 떨어졌다. 도깨비는 노란 꽃잎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떨어지는 것을 하나 손을 뻗어 잡았다. 꽃잎은 도깨비의 손에 닿자 화르륵 타올랐다.
‘부적이군. 무슨 속셈이지?’하고 생각하는 순간 화살 하나가 날아들어 절벽을 잡고 있는 도깨비의 손에 박혔다. 그리고 두 개의 화살이 돌이의 다리와 처녀의 등에 꽂혔다. 비명 소리와 함께 둘이 쓰러졌다. 강 건너 쪽에서 막내의 지휘에 따라 화살이 날아들었다. 도깨비는 다른 한 손으로 방망이를 들고 날아드는 화살을 쳐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절벽 위에서 주문을 외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깨비는 귀를 쫑긋 세우고 주문 소리를 들었다.
‘이 놈들이 이번에는…….’ 라고 생각하는 사이 그 주문 소리와 함께 풍덩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거대한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솟아오른 물줄기의 물방울이 떨어지며 셋을 덮쳤다. 절벽 위에서 바위를 굴려 떨어뜨리기 시작한 것이다. 꽂힌 화살 때문에 처녀의 등을 뚫고 나온 피는 젖은 저고리에 퍼져나갔다. 계속해서 바위가 떨어지고 처녀와 돌이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부짖었다.
“내 다리를 꼭 잡아. 빨리.”
도깨비가 처녀와 돌이에게 외쳤다. 둘은 엉금엉금 기어 도깨비의 다리를 꼭 끌어안았다.
돌이는 풍덩 소리가 있은 후 물줄기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것을 봤다. 그 물줄기 속에 사람의 형체를 한 차가운 느낌의 무엇인가가 사방을 살피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존재는 돌이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떨어지는 물방울과 함께 물속으로 슥 들어가 버렸다. 다시 물줄기가 솟구쳐 오르자 이번에는 확실히 물귀신의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돌이와 처녀의 귀에는 주문 외우는 소리가 웅웅 울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물이 쏟아질 때 물귀신이 돌이 일행을 덮쳐왔다. 도깨비가 순간 화살이 꽂힌 손으로 주먹을 쥐고 물귀신을 강하게 후려쳤다.
“도사들이 물귀신을 조종하고 있어. 물속으로 끌려가지 않도록 내 다리를 꽉 잡아 놓치면 안돼.”
물귀신은 도깨비의 공격에 부서져 물방울이 되어 사방으로 튀었다. 돌이와 처녀는 다시 그 물방울을 뒤집어썼다. 몸을 흘러내리는 물이 돌이와 처녀를 물 쪽으로 끌어가려고 당기기 시작했다. 당기는 힘은 몸에서 물이 흘러내리며 점점 강해졌다. 둘은 더 이상 도깨비의 다리를 잡고 있을 수 없었다.
“아저씨 물이 우릴 잡아당겨요. 더 이상…….”라고 돌이가 울부짖었다.
그때 절벽의 바위가 그그그 소리를 내며 옆으로 움직였다. 절벽의 바위가 미닫이문처럼 열리더니 안쪽에서 도깨비들이 나왔다. 도깨비들은 돌이와 처녀의 손을 잡을 덥석 잡아 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