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별곡 2
너는 내 맘 알 것이다.
일천구백구십구 년 명동롯데 백화점서
내 너를 처음 보고 근사하고 멋들어진
네 모습에 홀딱 반해 반겨 너를 내 주방에
들이고야 말았더라.
가죽 같은 겉치장에 길숨하니 잘 빠진 몸
이쪽은 냉장고요 저쪽은 냉동실이라
삼성엘지 신제품들 내 잘났다 번쩍번쩍
줄을지어 유혹해도 눈길조차 주지 않고
오직너를 점찍어서 하나하나 살펴본다
이때까지 냉장고들 아래위로 문을 낸 것
너는 유독 양문잡이 독특하고 세련됐네
디자인이 남다르네 유행을 앞서갔네
외국물 먹은 놈이 다르기는 다르구나
물 나오고 얼음 얼고 그 얼음이 반달모양
신기코도 편리하다 그런 니게 반하여서
없는 돈에 카드 할부 큰맘 먹고 샀더니만
그 돈 하나 아깝잖네 그 돈 값을 하는구나.
삼복더위 얼음물에 수박 한 통 들어가고
김치에다 조림 찌개 삶은 나물 생나물
먹다 남은 음식 반찬 너를 믿고 넣어두고
더운 여름 베란다에 불불개는 고추장도
소금단지 참기름도 걱정 없이 잊고사네
두부 계란 콩나물에 상추 배추 오이 호박
풋고추에 부추 당근 채전 밭이 따로 없네
봄 자두 시작으로 복숭 참외 포도 사과
썩지않게 갈무리해 시원하니 더 달구나
온갖 과일 거쳐가니 과일 밭이 따로 없네.
곡식이며 생선이며 먹다 남은 떡가지며
소, 돼지 닭고기 냉동실에 넣어두면
엄동설한 한데 둔 듯 꽁꽁 얼어 돌덩이라
고추 들깨 마늘 생강 할 때마다 귀찮았던
각종 양념 얼려두고 시시 때때 꺼내 쓰니
내 손을 거들어주네 음식 하기 쉬워졌네
부지런한 손놀림에 만두 어묵 아이스크림
여름겨울 철도 없이 아이들이 좋아하네.
사시장절 얼음얼고 차거운 물 우유 주스
콜라 사이다 맥주 소주 목넘김이 시원하다.
만든 반찬 쉬지 않고 고기생선 신선하고
봄날에는 나물반찬 한여름에 얼음냉채
가을곡식 떡 갈무리 한겨울에 김장김치
장마철에 채소 주고 가문날에 과일이라.
일 년 상시 끄떡없이 부엌에서 최고자리
든든하고 씩씩하다 장군처럼 서있구나.
들락날락 많은 손을 귀찮다 내색 않고
하나같이 차별 없이 얼음 주고 음식 주고
찬장대신 반찬 넣고 창고대신 재료넣고
뭐 먹을지 고민할 때 냉동실을 뒤적이면
닭 한 마리 황기백숙 삼겹살에 고등어에
시장이 따로 없네. 마트가 여기구나.
너의 능력 출중하여 너도나도 탐을 내니
집집마다 들여놓아 인간세상 편리하다.
밥솥이니 가스레인지 중하기는 하다마는
너의 능력 당할쏘냐. 부엌에서 일등자리
부엌 살림 하는 이의 둘도 없는 동반자라
너 없이는 하루라도 살아내기 쉽지 않다.
이사 온 날 빈 몸으로 날래게도 먼저 와서
자리 잡고 수평 잡고 황급히 전기 꽂아
행여나 상할세라 쉴 틈 없이 돌아가니
찬바람이 기특하다. 대단 쿠나 냉장고야.
냉장고문 매달려서 아이스크림 찾던 아이
어느듯 눈깜짝할 새 어른이 다되었네.
이삿짐꾼 잘못해서 삐뚤어진 문짝에도
불평 없이 잘살더니 세월이 무상하여
힘겨운 니 숨소리 한해 한해 깊어지고
밤새도록 골골대며 힘들게도 돌아간다.
그만할래 드러누워 내 몰라라 쉬련마는
말 못 하는 기계팔자 애석하고 불쌍해라.
인간이나 냉장고나 시간 앞에 장사 없네.
늙어 지친 몸으로도 오래도록 버티다가
하필이면 삼복더위 숨이 그만 뚝 끊어져
철통 같던 니 심장이 멈추고야 말았구나.
이일을 어찌할 거나 하늘이 노랗구나
정신이 아뜩하여 식은땀이 바짝 난다.
생명줄 전깃줄을 빼 보고 꽂아보고
어찌해야 좋을거나 참말로 떠난 거냐
앞을 보고 뒤를 보고 속을 보고 겉을 보고
눌러보고 두드려보고 열고 닫고 다해봐도
콧기침도 아니하네 바위처럼 꿈쩍 않네
힘들기가 오죽했음 체면조차 버리고서
오줌 싸듯 물 나오네. 말 못 하는 네 마음이
흘리는 눈물인가 안타깝고 슬프구나.
오호 애재라 아픈 가슴 눌러 짚고
내 급히 걸레 찾아 물을 닦아 내었건만
한번 간 니 숨이 돌아오지 않는구나.
황망하고 깜깜하여 어찌할 바 몰라하다
정신 차려 생각하니 새 냉장고 사야 한다.
새 냉장고 웬 말이냐 서러워도 할만한데
먼저 숨을 끊고 서둘러라 일러주네.
큰일 났다 큰일 났어 새 냉장고 오기까지
사흘이나 걸린단다 헌 냉장고 문을 닫아
찬기운을 가둬놓고 닦아주고 닦아줘도
자꾸자꾸 흐르는 물 또 닦으며 생각는다
이일을 어찌할 거나 답답한 심정으로
이리저리 머리 굴려 아무리 계산해도
마음만 급해지고 마땅한 답이 없네.
온 가족이 다모여서 죽은 너를 애달파해
어디 보자 혹시아나 다시 한번 꽂아보자
플러그를 꽂는 순간 잉잉잉잉 겔겔겔겔
이기 무슨 소리더냐 냉장고 소리로다
흥부네 박 터지듯 놀라자빠 지겠구나
냉장고가 돌아간다 기적이 일어났다
천지신명 냉장고신 전깃줄신 정주간신
감사하고 감사하다 냉장고가 살아났다
아이고 냉장고야 이기어째 된 일이고
네가 내 맘 알았구나 없는 힘을 짜내어서
숨 쉬는 거 내 잘 안다 내 걱정을 거둬갔네
고맙구나 기특구나 열 번 백번 말을 해도
고마움이 다할 소냐 안아주고 쓸어주며
정신차려 사흘동안 헤어짐을 준비한다.
새 냉장고 오는 날 내 맘을 단디 먹고
잘 가거라 내 동무야 그동안 고마웠다
미련 없이 내 손수 너의 숨을 거두노니
멋지구나 냉장고야 사흘낮 사흘밤을
나를 위해 싸워주고 너의 사랑 다 주고서
장렬히 전사하는 늠름한 노병이라.
니가 처음 오던 날에 내가 너를 채워 넣듯
네가 가는 마지막날 내가 너를 비워낸다
수고롭고 힘들었제 이제 그만 쉬러 가자
네가 만든 얼음들을 내가 아껴 먹을거나
네가 남긴 계란통은 언제까지 쓸 거구나
여기저기 생채기에 닳고 낡아 누래진 몸
정성 다해 씻고 닦아 고운수의 입혀주듯
단정하고 깨끗하게 치장하여 보내련다
애썼다 고생했다 잘 가거라 냉장고야
잘 가거라 내 동무야.
한평생을 찬속으로 춥게만 살았으니
따뜻한 데로 가서 편안히 지내거라.
내 너와 지낸 세월 고맙고도 애틋하여 글로 써 남기노라.
이천이십이 년 팔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