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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정애 Oct 11. 2024

순수의 시대

사물별곡 4

이제는 무디어져 그나마 애가 터지지는 않는다. 

나의 꽃편지. 

그 이야기를 쓸 수 있어진 것은 세월이 그만큼 흘렀다는 이야기겠지. 


1987년 나의 첫 발령지 청송의 부남 산골 학교였고 아이들과 지내는 일은 행복했지만 

그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남편이 사는 서울로 이동하기 위해 혼인신고를 하고 주소지를 서울로 두고 있는 상태였다. 

서류상 남편이나 그냥 연애 중인 아가씨와 청년, 처녀 총각이었다. 

거리가 너무  멀어 만나는 것은 거의 1년에 서너 번? 정도였고 핸드폰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다.

급한 연락도 학교 전화 밖에 없었다. 

오직 편지가 마음과 소식을 전할 있는 길이었던 시기다. 


온통 내 마음을 그에게 가있어 밤마다 편지를 썼다. 

매일 내 편지를 가져가고 그의 편지를 가져 올 우체부를 기다렸다. 

2교시를 마칠 즘 학교 앞 신작로를 오토바이를 탄 우체부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게 보이면  가슴이 뛰었다. 

교무실 창문 안쪽 턱에 가져온 신문이나 우편을 두고 거기 올려놓은 학교가 보내는 우편물을 가져갔다. 

거기엔 내가 보내는 편지가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있었다. 

내 편지가 없으면 우체부 아저씨는 신정애 선생님 오늘 편지 없느냐고 물어봤다. 

우표가 떨어지지 않도록 읍내 나가면 문방구나 우체국이나 우표를 파는 곳이면 들어가서 일단 우표를 샀다. 우표는 학교 책상 서랍에도 있고 집에도 있고 지갑 속에도 넣고 다녔다.  

마치 핸드폰 보조 배터리 같이- 우표가 있어야 안심이 되었다.      


우체부가 다녀간 뒤 쉬는 시간이면 쏜쌀같이 교무실로 가서 편지를 확인했다. 

굵게  한자로 쓴  회사 이름과 갈색 로고가 있는 조금 크고 두꺼운 흰 회사 편지 봉투. 다른 우편물과는 확연하게 구별이 되었다. 그리고 크고 예쁘게 쓰인 내 이름과 다정한 그 글씨체 – 얼굴을 보는듯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회사 생활에 바쁜 남편은  매일 보내는 나의 편지에  1주일에 한번 정도 답을 보내왔다. 

편지를 가지고 계단을 올라 교실로 가는 동안의 그 설렘을 오래 간직하려고  편지를 뜯지 않고 책갈피에 넣어두고 수업을 다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봄이 되자 학교 교정이며 들판에서 피는 꽃들이 얼마나 향기롭고 아름다운지 꽃을 따서 일일이 책갈피에 말려 편지에다 붙여서 보냈다. 

지금 생각해도 아름다운 편지다. 

편지 가장자리에 꽃을 붙이고 아이들과의 생활은 어떠한지 오늘 나는 뭘 했는지 가득 편지를 썼다.       

그 편지를 받은 남편 또한 다른 편지들보다 꽃향기 가득한 그 꽃 편지가 너무 아름답고 소중했으리라. 


그런데 그 편지를 몽땅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딱 꽃 편지만 몽땅 다아--

너무 예뻐서 더 오래 간직하려고 복사를 하겠다고 따로 빼놓았는데 사무실을 이사하면서 다른 서류 더미에 같이 섞여서 어쩌다 다 잃어버렸다는데 정확하게 어떻게 잃어버린 건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결혼을 하고 4-5년 후에야 난 그 사실을 알았고 심장을 도려내는 듯했다. 

그 소중한 편지를 잃어버리다니 너무 화가 나서 남편을 때리면서 울었다. 

돌이킬 수 없고 찾아낼 수도  없고 그 편지가 아깝고 - 

 주고 살 수 있는 물건이면,  다시 만들 수 있는 거라면 '괜찮아 그럴 수 있지' 하고 말았을 일이었다.   

한동안 그 생각이 날 때마다 너무 화를 내니까  남편도 편지는 받은 사람이 주인이니까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거 아니냐 항변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걸 간수하지 못한 남편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그때의 나의 감정과 생활과 향기가 오롯이 거기 있는데 너무 아까웠다. 

길 가다도 그 생각이 나면 심장이 뛰고 말하기가 싫어졌다. 

온몸을 마구 채워 오는 속상함의 수위를 낮추느라 혼자 속으로 애먹었다 - 

아마 살면서 제일 많이, 제일 오래 화를 냈을 거다. 

 

정말 화가 났던 일도 시간이 지나면 대부부는 무디어진다.  

하지만 꽃편지는 상처가 너무 오래갔다. 

시간이 해결해 주는 마법에 잘 안 걸렸다.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된 삶이었던 때여서 더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을 뿐 

아이를 키우고 정신없이 치열하게 이리저리 치이면서 살다보니  시간의 지혜가 스며들어 저절로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것은 자연의 순리 같은 거였다. 


지금 나는

'그거 뭐 지금쯤은 잃어버리지 않았다 해도 아마 꽃잎도 다 벌레 먹고 썩어서 바스러지고 없어졌을 거다. 

잃어버리지 않고 있다 해도 살면서 한 번도 안 꺼내 봤을 거야'

렇게 위로할 줄 알게 되었다. 


내가 떠나보낸 물건들 중 가장 아까운 물건이다. 세탁기나 피아노와는 다른 -

그저 우리 두 사람의 머릿속에서나 그려볼 수 있는 –  어쩌면 그래서 더 아름다울지도. 


여기 사진들은 그 때의 꽃 편지는 아니다. 없어졌으니 사진을 찍을 수 없다.  2년 후 월정 국민학교로 전근 가서 그린 꽃그림 편지 봉투들이다. 진짜 꽃 대신 꽃그림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순수의 시대라고 해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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