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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정애 Oct 18. 2024

야구나  봐야겠다

사물 별곡 5 

피아노를 팔기로 했다

나가 살던 딸이 집으로 들어오면서 방에서 쫓겨나 갈 곳이 없어진 피아노는 거실 식탁에 붙여 두게 되었다. 자주 치지도 않고 너무 낡기도 해서 고심 끝에 피아노를 팔기로 했다.      


우리 피아노는 야마하 업라이트 작은 사이즈로 예쁘다. 살 때 중고로 산거라 그동안 수리도 여러 번 했지만 이제는 너무 늙어서 소리를 내기가 힘들어졌다.

이 피아노는 윗 뚜껑과 아랫부분을 열어 쉽게 속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피아노가 내는 소리만큼이나 아름다운 부채 살 모양의 현들이나 수많은 나사들이 줄 맞춰 있는 모습이 신비로워 넋을 놓고 보곤 했다.


어린이날이라고 라디오에서는 동요가 나오고 피아노 맨이 12시쯤 온다고 문자가 왔다.


이제 마지막이야. 우리는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당신의 연주는 더듬대고 내 노래는 삑사리가 나고 피아노는 음을 절면서 소리를 냈다.  늙은 연인이, 늙은 피아노를 치며 젊은 연인들을 부른다.

'저기 멀리서 우리의 낙원이 손짓하며 우리를 부르네' - 늘 같이 부르던 노래가 이별곡이 되었다.  


 피아노는 떠날 준비가 다 되었다. 아주 작은 갈색 리본 하나를 피아노 뒤쪽 구석에 넣었다.


피아노 자리가 텅 비었다

드디어 작업복 차림의 아저씨가 오고 이리저리 피아노를 살펴보고 건반을 두드려 보고 속을 열어 본다. 피아노 속 가늘고 굵은 쇠줄들은 질서 정연하면서도 화려하다. 점잖은 척하는 겉모습과는 다르다. 쇠줄이 녹슬기도 하고 탄성을 잃은 해머도 있다.

존재감과 달리 그 어떤 경제적인 가치도 없어 돈을 쳐주기는 곤란하다고 한다. 돈을 안 받아도 된다고 하자 금방 늙은 피아노를 옆으로 세워 바퀴 달린 판 위에 올렸다. 한 푼어치의 가치도 없는 몸으로 전락해서.

자존심을 버린 듯 피아노는 모로 세워져도 별 말이 없었다. 건반들이 옆으로 쏠리면서 어지러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잠깐 멈추고 부끄러운 모습이라 싫어했지만 사진을 찍었다.  문이 열리고 자연스럽게 사람처럼 피아노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피아노 의자를 같이 보냈다.


피아노 자리가 텅 비었다.


배가 고파서 얼른 점심을 차렸다. 피아노가 없으니 식탁을 쓸 수 있게 되어 좋다며 밥을 먹는다. 피아노가 마음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다. 당신도 그럴 것이다. 

커피를 마시면서 우리는 이미자의 1집을 들었다. 아련하게 오늘 날씨와 잘 어울리는 동백아가씨, 그리고는 라디오를 켜 재즈 연주를 들었다.      


야구나 봐야겠다

피아노는 예쁜 소리를 내려고 끝까지 애썼다. 저음의 부드러움과 고음의 맑음을 잃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다. 도와 솔 샵과 높은 레 자리가 안 나왔지만 안간힘을 써서 도는 나오다 안 나오다 했다.


힘들어도 바르게 서서 나갔으면 좋았을 걸. 옆으로 세워져 그 육중한 몸이 가볍게 실려 나가는 게 미안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피아노 안녕.

너 안에 있는 우리의 노래들을 기억해 줘.

    

어느새 라디오는 해금 연주다. 애닯기도 하여라.

음악 따위는 꺼버리고 야구나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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