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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정애 Sep 22. 2024

너를 비운다 4

사물별곡 1 / 새냉장고 / 너를 비운다

새 냉장고

5분도 안 되어 같은 길로 새 냉장고가 왔다. 방금 보낸 냉장고는 아예 잊고 환호하며 우리는 이 반짝이는 새 냉장고를 맞이했다. 근사하다. 기능도 많다. 첩첩이 비닐로 포장된 서랍에서 새 플라스틱 냄새가 났다. 넓고 깊고 좋다.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금방 낡은 냉장고가 있던 자리를 턱 하니 차지하고는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듯 낯가림도 없이 편안하게 있다. 너무 조용해서 냉장고가 멈췄나 귀를 대보고 문을 열어본다. 


새 냉장고는 멋지다. 좋다. 넓고, 깊고 조용하다. 아직 지난 냉장고를 쓰던 버릇대로 손이 가서 문을 자꾸 잘못 연다. 그때마다 지난 냉장고가 생각난다. 모두 새 냉장고의 동그란 공 같은 신기한 얼음을 먹지만 난 떠난 냉장고가 주고 간 반달 얼음을 아껴 먹고 있다. 계란을 가득 담고 있는 통은 새 냉장고에서도 확실한 자리를 잡았고, 선반은 어쩌면 맞춘 듯 크기가 딱 맞아 CD꽂이로 책상 위에서 자기 역할을 찾았다. 깔끔하고 단정하다.  

오래지 않아 새 냉장고가 익숙해지고 너를 잊어가겠지. 당연하게. 그렇다 해도 가끔은 너를 기억할 거다. 

우리가 준비할 수 있도록 죽음이 왔다는 신호를 미리 보내주고 3일의 시간을 버티어준 속 깊은 너의 배려를,  너와의 오랜 시간을 추억할 거다. 


< 너를 비운다 >


평생 죽어라 일만 하고 

기운이 달려 밤새 그릉 거렸다.

 온몸 불덩이 같더니  숨이 뚝 멈추었다.     


수없이 열고 닫아도 

힘들다, 싫다 내색 않고  시원하게 웃어주고   


너에게 매달렸던 아이들은 이제 어른이 되고  

마지막까지 참 억척스럽게도 살아냈다.   


애썼다.

수 만 번 스치고 닿았던 내 손으로 


고맙다.

처음  반가이 너를 채웠듯 


고생 했다.  

오늘 기쁘게 너를 비운다. 


수고했다. 

긁히고 때 낀 색 바랜 몸


 잘가거라 

고운 수의 입히듯  너를 닦는다. 


평생을 찬 속으로 살았으니 

따뜻한 곳으로 가 편히 쉬어라.   

친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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