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 별곡 1 /마지막 3일/ 조용히 숨을 멈추다
저녁에 식구들이 오고 이 크나큰 사건, 냉장고가 멈춘 걸 확인해주려 플러그를 꽂았는데 어? 탁 하고 내려가야 할 누전 차단기가 내려가지 않는다? 으잉? 뭐야? 잠깐, 기다려봐. 아직, 기다려봐- 한참을 기다려도 누전 차단기는 조용하고 냉장고가 전과 같이 겔겔 거리며 돌아간다.
아악!! 냉장고가 살아났다. 냉장고가 다시 살아났어! 냉장고 밑으로 물이 흘러나올 때마다 종일 닦아주면 애틋해하던 마음을 냉장고가 알았나 보다. 내가 냉장고를 살려낸 것이다. 아니 냉장고가 힘을 내준 것이다.
물이 차면 냉장고가 죽는다. 계속 물을 닦아내는 생명 연장술로 겨우겨우 숨쉬기를 하며 냉장고는 버티어 줬다. 깔끔하고 숨소리도 안내는 조용한 새 냉장고가 들어올 때까지 사흘 밤낮으로 힘겨운 숨을 쉬며 얼음을 만들고 음식들을 잘 보관해 주었다. 마지막 3일의 삶은 냉장고가 살아온 20년과 맞먹는 시간이었다. 그만큼 간절한 상황이었다.
그 사흘 동안 냉장고는 제자리에 들어가지 않고 주방으로 한발 반쯤이나 나온 채로 지냈다. 식탁과 냉장고 사이를 좁게 지나다니는 그 불편함은 냉장고를 느끼고 그의 존재를 기억하는 의식과 같은 것이었다.
냉장고를 안으며 비켜 지나갈 때마다 쓸어주고 만져주는 것으로 우리의 고마움과 아쉬움을 표하며 마지막 3일을 보냈다.
새 냉장고가 들어오기 1시간 전, 평소와 같이 냉장고 문을 열어 마지막으로 가득 찬 냉장고 속을 찬찬히 보고 문을 닫았다. 플러그를 잡는 손에 모든 감정들이 모이는 게 싫어 망설이지 않고 뽑았다. 바로 그르릉 대던 숨이 뚝 멈추었다. 냉장고를 죽였다.
곧바로 냉장고를 비우기 시작했다. 냉동실에는 마지막 선물처럼 반달 얼음이 가득 만들어져 있었다. 버리지 그걸 뭐 하려고 담느냐, 새 냉장고에서 새 얼음을 먹으면 돼지. 냉동실 자리만 차지하게 - 그렇게 나무라도 냉장고가 남겨 주고 간 얼음을 비닐 팩에 가득가득 버리지 않고 다 담았다. 냉장고는 속에 있던 모든 것들을 다 내놓고 결국 낡고 색 바랜 텅 빈 껍질만 남았다.
냉장고를 장식해 주었던 예쁜 그림 자석들을 떼냈다. 누레진 긁힌 몸을, 때가 낀 틈새를 정성껏 닦아 깨끗하고 예쁘게 단장을 했다. 버릴 건데 뭐 하려고 씻고 닦느냐 힘만 더 들지 소용없는 짓을 한다는데 나는 이 냉장고의 마지막 길을 지저분하지 않게, 갈 때도 처음 올 때처럼 단정하게 해주고 싶었다. 아무리 해도 그렇게 될 수는 없지만 빈 냉장고 속을 닦아주며 둘만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녹아 없어질 것이지만 반달 얼음 두 팩과 얼음 만드는 장치 위에 얹혀 있던 귀여운 선반과 계란이 20개는 거뜬히 들어가는 통을 유품으로 우리는 챙겼다.
냉장고는 떠났다. 기사님들 손에 쓸모없는 고장 난 하찮은 물건으로 마구 들려 문을 나가는 냉장고를 따라가며 쓸어주는 나를 보고 기사님이 웃으셨다. 나는 속으로 눈물이 조금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