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은 필요충분조건
입추(立秋), 절기상 가을이 왔다. 어쩐지 평소와 조금 다른 선선함이 돌고 어제까지만 해도 있었던 찜통 같은 더위가 조금은 사라진 것만 같다. 물론 아직 불볕더위를 조심하라는 경보 문자가 오긴 하지만, 그래도 해가 진 저녁에도 걷기 어려울 만큼 더웠던 날에 비해 이젠 조금씩 걷다가 인중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의 더위로 체감된다.
어제는 너무나 운동이 하기 싫은 날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잠에서 깨어나 침대 위에서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이젠 진짜 준비해야겠다 싶어 '씻으면 좀 낫겠지'라는 생각으로 씻고 나와 또 한참을 옷을 보며 고민을 한다. (사실 아무 생각 없이 옷장을 살펴봤다.) 셔츠 하나 입고 침대에 눕고, 바지 하나 입고 눕고, '역시 위아래 다 챙겨 입기엔 더운 날이야'라며 결국 시원한 소재의 원피스로 갈아입고는 또 한참을 누워있었다. 다시 진짜로 출근해 보자고 털레털레 나와 가파른 언덕 위를 걸어가면서도, 붐비는 버스와 지하철 안에서 타인의 출근길 감정이 느껴질 만큼의 과도한 치임의 연속에도, 오늘따라 말도 안 되는 요구들이 가득했던 업무 안에서도 짜증내거나 화낼 기운조차 없을 만큼 무기력했던 날. 습관처럼 커다란 가방에 운동할 준비를 챙겨 오긴 했지만, 결국 퇴근 후 애인에게 전화해 지치는 하루를 토로하고선 운동을 건너뛰고 문래동에서 만나기로 했다.
상대적으로 유연하게 출퇴근이 가능해 기다리는 시간이 익숙한 나는, 문래역 쉼터에 앉아 다양한 콘텐츠를 읽다가 조금 지겨웠을 때 즈음 평소 하던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갑자기 누군가 스윽- 옆에 앉아 귓속말을 걸어왔다. "깜짝이야!" 전혀 생각하지 못한 순간에 예상보다 빨리 나타난 나의 애인은 가끔 이렇게 나를 놀라게 한다. 마음이 지쳐서 그랬을까? 사실 거의 매일 보다시피 하는 사이지만 어쩐지 오늘따라 더 반가운 등장이다. 나는 그를 만나자마자 익숙하게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길을 나섰는데 역시 그의 눈에도 평소보다 지친 기색이 눈에 띄었는지 오는 길에 찾아봤다던 멕시칸 식당으로 데려갔다. 단골 식당이 있을 만큼 멕시칸 음식을 좋아하는 우리 커플인데, 결혼을 앞두고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 나를 생각해서 최근엔 자제했던 메뉴기도 하다. 그는 술을 못 마시지만, 술을 좋아하는 나를 잘 알기 때문에 오늘만큼은 칵테일 한 잔 정도 마셔도 된다며 재차 권했지만 불굴의 의지로 제로콜라를 골랐다. "운동도 건너뛰는데, 제로콜라는 나의 양심이야."
급하게 찾은 식당 치고는 내부 분위기도, 사장님도, 물론 음식 맛까지도 모든 것이 친절했다. 평소 고수를 싫어하고 쌀국수에 고수가 살짝만 담겨있어도 풍기는 향을 정말 안 좋아하는데, 왜인지 오늘은 고수를 한번 도전해 볼까? 싶은 마음이 들어 고수를 듬뿍(내 기준으로) 들어 올렸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날 쳐다보며 고수라고 알려줬지만 안다고 대답하고선 기세등등하게 타코에 돌돌 말아 입에 넣어, 태어나 처음으로 씹고 넘기기까지 성공했다.
- "고수를 먹다니"
- "아냐 먹긴 먹었는데, 먹진 않아. 그니까 역시나 향이 희한한데 그게 맛있는 것도 아니고 맛이 없지도 않고 정말 희한한데, 희한하게 넘어가~"
- "먹으니까 살아나네"
하지만 역시 나는 고수를 다시 먹진 않았고, 먹을 만은 했던 것으로 남긴 채 기분 좋은 상태로 식당을 나섰다. 어두운 밤이 되고 나니 아까보다는 좀 더 선선한 느낌이 든다. 이 정도는 산책까지 가능하다 싶어 따뜻한 그의 손을 잡고 신도림 역까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갔다. 집에 도착할 때 즈음 아까보단 확연히 나아졌는지 수리 중인 엘리베이터로 인해 18층까지 걸어 올라가는 것이 화나지 않았다. 집에 도착해 화장을 지우고, 시원한 물로 샤워를 마쳤다. 그렇게 하루를 마치고 잠에 들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오랜만에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